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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한국 대사관 고쳐 짓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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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금 미국 워싱턴의 코네티컷가에는 축구장 다섯 개 반 넓이의 초대형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 완공이 목표인 주미 중국 대사관이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피라미드를 만든 세계적인 중국계 건축가 I M 페이가 설계한 이 건물은 전체 면적이 4만㎡(약 1만2000평)로 미국에 세워진 대사관 중 가장 크다. 중국 인부 500명이 중국산 자재로만 짓고 있는 이 건물이 완공되면 워싱턴 한복판에서 ‘떠오르는 대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랜드마크가 될 게 분명하다.

굳이 중국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세계의 수도라는 워싱턴에는 나라마다 국격(國格)을 자랑하는 개성 있는 대사관 건물이 적지 않다. 주미 한국 대사관 근처에 있는 일본 대사관은 전통 건축과 조경술이 조화를 이뤄 찬탄을 자아낸다. 일본 문양이 그려진 현관을 지나면 1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도 있다. 이 건물은 봄이면 포토맥 강변을 뒤덮는 벚꽃과 함께 일본의 이미지를 워싱턴에 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딕 체니 부통령 관저 옆 영국 대사관은 미국인이 각별한 애정을 가진 윈스턴 처칠 동상을 정면에 배치해 눈길을 끈다.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홀을 갖춰 ‘특수 관계’로 불리는 미·영 간 만남의 장으로 손색없다. 2년 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생일날엔 이곳에서 깜짝 파티를 열어 막 장관에 오른 그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워싱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포토맥 강변에 새로 들어선 스웨덴 대사관은 외교관들 사이에 ‘꿈의 공관’으로 꼽힌다. 입지가 뛰어난 건 물론이고 최첨단 건축미와 함께 공연장·문화원·홍보관 등 모든 기능을 한데 갖춘 복합구조 덕분이다. 워싱턴 시민은 이 건물을 ‘스웨덴의 집(House of Sweden)’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우리의 주미 대사관은 어떤가. 수십 년 묵은 5층 건물은 색깔부터 칙칙한 잿빛으로 군용 막사를 연상케 한다. 내부엔 내무반처럼 늘어선 사무실 수십 개에 주재원 100여 명이 들어차 있다. 1인용 사무실에 칸막이를 치고 두 명이 쓰기도 한다. “3년 동안 숨만 겨우 쉬다 떠나는 곳”이란 퇴역 주재원의 푸념도 과장이 아니다.

세계의 수도라는 워싱턴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보여 주는 상징 노릇을 하기엔 어림없다. 현관에 걸린 태극기 말고는 지나가는 이들이 ‘한국’을 느낄 수 있는 특징이 거의 없다. 손님맞이는 대사관의 가장 큰 업무의 하나지만 이를 위한 대형 홀이 없어 매년 6·25나 개천절을 맞아 대형 리셉션을 열 때마다 장소를 구하느라 쩔쩔맨다.

대사관 안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절감해 개축하자는 의견이 여러 번 나왔다. 그러나 정부에서 ‘일은 안 하고 시설 탓만 하느냐’ 할까 봐 입을 다물어왔다. 하지만 이젠 정말 진지하게 개축을 추진해야 할 시점이 됐다. 무섭게 커지는 중국 대사관을 의식해서만은 아니다. 주미 대사관 건물이 주중·주러·주일 대사관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지적 때문만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이유는 한국이 미국에 기울이는 관심과 노력을 대사관 건물이 상징하기 때문이다. 향후 100년 동안 한국이 가장 큰 비중을 둬야 할 나라는 여전히 미국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다음 세기까지 한·미 관계를 받쳐줄 버팀목으로 대사관은 미와 효율을 겸비한 복합건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이래 변함없는 근무 인원도 그간 발전한 한·미 관계에 맞춰 늘어나야 할 것이다.

때마침 주미 대사관은 1891년 고종이 자주 실용외교의 상징으로 워싱턴 시내에 설치했던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 건물 매입을 추진하겠다고 지난주 발표했다. 근대외교의 초보자였던 고종도 미국의 중요성을 파악해 내탕금을 털어 외교공관을 워싱턴에 세운 사실을 기억한다면 대사관 개축의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