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포커스>"사이코의 섬"구동독출신 한스 요하임마즈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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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규율.질서.자제력 등 집단적 가치가 우선되는 독재체제에서 국민은 각개인의 자연스런 감정이나 욕구를 최대한 억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그렇게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데 따른불만.분노.체념.좌절은 국민의 정신세계를 황폐화시 켜 결국 기형으로 만들어 버린다.국민은 언제나 이런 감정이 의식의 표면에떠오르지 않도록 무의식 속 깊숙히 묻어둬야 하기 때문이다.그 결과 억압체제아래의 국민은 진정한 인간적 관계와 애정까지도 두려움을 느끼는 방어적 입장을 취한다.
이런 메커니즘은 물론 억압체제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런 체제의 탄생을 부르고 체제유지를 돕는 요인이기도 하다.』 억압체제가 국민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황폐화시키는가를 풍부한 임상경험을바탕으로 분석한 책이 최근 번역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舊동독출신 정신과의사인 한스-요하임 마즈가 쓴『사이코의 섬』(원제 Der Gefuhlsstau)은 舊동독의 정치체제와 동독시민의 정신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舊동독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지금도 분단상황 아래 놓인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52세인 저자 마즈씨는 독일이 통일되기전 10년동안 무려 5천여명의 정신질환자를 상담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번역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옮겼던 송동준 서울대교수가 맡았다.
한반도 통일논의가 활발한 시점에서 소개되는 이 책은 舊동독과유사한 체제 아래 살고 있는 북한주민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지금까지 통일논의 하면「통일비용」이라는 용어에서도 보듯 지나치게 경제적인 면 만이 강조돼 왔다.그러나 수십년간 반목해왔던 두 체제가 하나로 순조롭게 통합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보다도 국민 정신구조의 변화가 선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북한주민의 정신구조를 유추,통일에 대비하는데 도 어느정도 참고가 될 뿐 아니라 억압체제의 폐해를 확인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7장으로 구성된『사이코의 섬』은 舊 동독체제에서 자행된억압의 여러 형태,그 억압이 국민정신에 미친 영향,국민정신의 황폐화에 대한 보상의 형태,89년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 동독측의 정치적 변화과정에 대한 심리적 분석과 비판등 이 비교적 쉽게 쓰여있다.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특히 통일과정에서 동독주민이겪어야했던 정신적 갈등,왜곡된 정신세계를 정상으로 복구하는 여러 아이디어까지 제시되고 있어 흥미롭다.
먼저 저자 마즈는 舊 동독을 지배하던 억압체제의 뿌리를 사회주의가 아닌 히틀러의 파시즘에서 찾고 있다.1945년 전범재판을 통해 전범 몇명을 처형하거나 처벌하는 것으로 파시즘이 청산된 것은 아니며 히틀러의 억압체제아래 뒤틀린 정신 세계가 「슬픔의 청산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마즈가 꼽는 억압의 주체는 黨이나 정보기구등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국가권력기관에 그치지 않는다.국민도 피해자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가해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이 한 예가 된다.『조용히 해』『앞에 나서지 말고 시키는대로 해』라는 식의 지시가 난무하는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릴때부터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다는 설명이다.어린 시절부터 삶의 기쁨이나 즉흥적인 감정의 표현, 자연스런 호기심을 제한받기 때문에 군사적 규율에 익숙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이다.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사이코의 섬』으로 붙인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舊 동독주민 모두가 사이코증세를 지녔다는 뜻에서다.철권을 휘둘렀던 에리히 호네커 前동독공산당서기장 역시 정신구조를 분석해보면 기본적 욕구와 감정을 억제당한 정신적 희생자였음을 알 수 있다.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줄곧 굶주림과 빈곤,전쟁등을 경험한 호네커는 가정에서나학교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개체로서 성숙할 기회를 갖지못했던 것이다.그러면 기형적인 정신세계의 치유는 어떤 식으로 전개 되어야 하나.저자는 정치.경제.법률.군사.의료분야에서 뿐아니라 교통.도시건설.건축학등 사회 전반이 「치유문화」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즈는 특히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가정교육에서 권위주의의 잔재를 털어내고 자녀와 부모간에 동반자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하고 있다.
〈鄭命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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