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너무한 남자, 그대 이름은 '애완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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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집에선 구박만 받고, 혼자 자취하고 싶은데 마련해 놓은 돈은 없고…. 매일 시청하면서 ‘나도 펫이 되었음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20세 남자)

“제가 동안이라는 소리는 많이 듣지만 정신연령은 늙었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귀여운 펫을 길들여보고 싶어요.”(20세 여자)

코미디 TV의 ‘애완남 키우기-나는 펫’ 시즌 2 출연 신청자 모집 게시판. 남자 셋, 여자 셋을 뽑는데 신청자는 650여 명이 몰렸다. 펫(pet)은 말 그대로 애완동물. 이 프로그램은 혼자 사는 여성에게 ‘애완남(애완용 남성)’을 한 명씩 분양해 3개월간 한 집에 살면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카메라에 담는 ‘리얼 드라마’다. 곰TV 다운로드 및 각종 포털 검색어 1위에 오르면서 순식간에 ‘애완남 신드롬’을 퍼뜨렸다.

◆넌 펫일 뿐이야=‘딩동!’하고 벨이 울리면 택배가 도착한다. 커다란 상자 안엔 머리에 리본을 곱게 묶은 애완남이 앉아 있다. 시즌1 첫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적게는 4살, 많게는 12살까지 차이나는 연상의 누님들이 펫들의 주인이다. 희주는 애완견 씻기듯 띠동갑 애완남 숭민의 얼굴을 씻기고, 애완견과 똑같은 옷을 사 입힌다. 깔끔한 청미에게 분양된 세혁은 새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드러눕고 담배를 피우는 등 다루기 힘든 불량 펫. 참다 못한 주인은 애완남을 맨발 차림으로 문밖에 쫓아내 버릇을 들인다. 주인을 ‘누나’도 아닌 ‘주인님’이라 부르며 틈만 나면 스킨십을 시도하는 능글맞은 애완남 동근에게 주인 목련은 “난 네가 남자로 안 보여, 넌 펫일 뿐이야”라 대꾸한다. 그렇다고 펫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건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데다 미녀 주인과 사니 눈도 즐겁다. 출연자 임세혁(23)씨는 “착한 주인을 만난다면 실제로 애완남이 돼 볼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남녀가 한집에 동거하는 설정이라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있지만 드라마는 선을 넘지 않는다. 명랑만화에 리얼리티 포맷을 섞어놓은 느낌이라 비교적 건전하고 발랄하다. 첫 회는 다시보기만 100만 건을 넘겼다. 28일부터는 조금 더 연령대가 낮은 세 커플이 등장하는 시즌2가 시작됐다.

◆애완남 하나 키우실래요?=독특한 건 애완남 신드롬이 남성들 사이에서 더 뜨겁다는 사실이다. 시즌2 출연 신청자 650명 중 600명이 남자였다. 직업은 휴학생·재수생·취업준비생이 대부분. 안성훈 PD는 “주인과 펫이란 관계 설정이 돼 있긴 하지만 아직은 여성들이 ‘동거’란 설정에 거부감이 큰 것같다”고 말했다. 방송 시작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긴 애완남 중개 카페의 회원도 대부분 남성이다. 회원 수 1200명이 넘는 다음카페 ‘애완남 키우기 나는 펫’의 경우 애완남이 되겠다며 사진까지 올린 남성 신청자 수는 300명을 넘어섰지만 공개된 여성 신청자는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이다. ‘주인님을 찾습니다’ ‘보면 볼수록 매력있는 펫입니다’ ‘미워할 수 없는 코커스(파니엘)! 왈왈’ 등 남성들의 자기소개서 제목만 봐도 자존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20대가 대다수이긴 하지만 30대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코미디TV의 프로그램 게시판도 한때 ‘주인님을 구한다’는 남성들의 글이 오르는 바람에 관리자가 일괄 삭제하고 경고문을 올리는 등 몸살을 앓은 바 있다. 네이버 지식인 등 공개된 인터넷 공간도 마찬가지다. 집안 일을 잘한다는 20세 남성은 ‘애완남 키우실 분’이란 제목의 글에 “20세 이상, 먹여 살릴 능력이 되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여성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예전 같으면 남자 체면 때문에라도 상상 못할 일이다. 문화평론가 김종휘씨는 “직업 구하기 힘들고, 독립은 갈수록 늦어지는 등 설 자리가 없는 우리 사회 20대 청년들의 좌절과 부담감이 크다 보니 경제력 있는 여성에게 기대고 싶은 심리가 나타나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애완남 VS 알파걸=신조어의 흐름만 봐도 이런 변화상을 읽을 수 있다. 남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메트로섹슈얼(패션·외모에 민감한 남성)’ ‘훈남(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남성)’ ‘완소남(완전히 소중한 남자)’에서 ‘애완남’으로까지 진화하는 동안 여성 쪽에선 ‘골드미스(경제력 있는 30대 여성)’ ‘알파걸(여러 면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엘리트 여성)’이 신조어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주변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라 애완남으로 살기보단 TV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 오른 ‘애완남 키우실 분’ 공고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스무 살에 개가 되고 싶냐?”

동거 마지막 날 이별주를 마시자며 애완남에게 능숙한 솜씨로 폭탄주를 만들어주는 희주,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용 사진 촬영을 위해 애완남을 짐꾼으로 부리는 청미…. 능력있는 싱글 여성이 연하의 남성을 애완용으로 데리고 산다는 만화같은 이야기를 ‘리얼’한 상황으로 만든 ‘애완남 키우기-나는 펫’의 안성훈 PD에게 촬영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었다.

"황당한 얘기지만 시청자들 대리만족 느끼는 듯"

‘애완남 키우기 …’의 안성훈 PD

-프로그램을 만든 계기는.

“우연히 ‘너는 펫’이란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버라이어티로 패러디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연자는 어떻게 섭외하나.

“시즌1에선 여자 출연자들은 지인을 통해 연기 경험이 있는 인물들로 섭외했고, 남자는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받았다. 시즌2는 지원자 중에서 선정했다. 여성의 경우 2명은 지원자 50명 중에서 고르고, 나머지 한 명은 지인을 통해 뽑았다.”

-출연자 선정 기준은.

“캐릭터·성격을 가장 먼저 본다. 출연자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프로그램이라서다. 다음이 외모다.”

-실제로 3개월간 동거하나.

“촬영에 들어가는 주 3일간은 24시간 동거한다. 예전에 방송된 ‘god의 육아일기’와 같은 방식이다.”

-어디까지가 ‘리얼’인가.

“정확히 말하면 ‘설정 리얼 드라마’다. 상황만 설정해주면(20%), 나머지(80%)는 자신들의 실제 캐릭터를 그대로 보여준다. 상황과 개요만 주어질 뿐 그 외엔 작가나 PD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영향으로 ‘애완남’ 카페가 여럿 생겼는데.

“방송 의도와는 달리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속하는 사람이 많은 듯해 우려가 크다.”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비결이 뭘까.

“꽃미남을 펫으로 키운다는 건 다소 황당해 보이지만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소재다. TV를 통해 대리만족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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