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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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어쩌다가 여기에 와 있게 된 걸까….
나는 부엌의 가스레인지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건물 사이사이의 밤하늘에 박힌 별들과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나는 문득 지난밤을 생각해봐야 한 다고 생각했다.그래,라이브러리의 화장실에서 토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토하는 김에 다 토하라면서 누군가가 내 등짝을 마구 때렸는데너무 세게 때리는 바람에 등짝이 아팠었다.그런데 나는 뭐라고 말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힘들어 하면서도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그래,때리다가 힘들면 관두겠지 속으로 그러면서 …그래,시간이가면 다 지나가겠지.고2도 고3도 다 지나가겠지 뭐.지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어휴 정말 지긋지긋한 시절이라고,나는 입을 벌리고 억 억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거기서 필름이 딱 끊겨 있었다.아니,여럿이 나를 택신지 뭔지에 밀어넣던 게 생각났고,차가 달리는데 내가 어떤 여자의 무릎에 누워 있던 장면도 떠올랐다.야 이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씨팔,내가 겨우 눈을 뜨고 중얼거리니까 여자가 말없이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것도 생각났다.걱정하지 말구 편하게 있어.여자의 손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던 것까지기억할 수 있었다.
인기척에 뒤돌아 봤더니 계희수가 서 있었다.그애는 하얀 원피스 잠옷바람이었고 그애는 나를 내려다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이미 눈이 어둠에 익어서 그애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애는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그애가 몇발자국을 옮겨서 내가 앉은 건너편 소파에 올라앉았다.그애는 맨발이었고 그래서인지 그애가 걷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그래서인지 그애는 귀신같기도 하였다. 계집애는 소파 위에서 두 팔로 두 무릎을 가슴에 안고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은 궁상맞은 자세를 하고 나를쳐다보고 있었다.멀리서 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오는 것같은 아주 조용한 새벽이었다.
『담배… 있어?』 그애가 기껏 꺼낸 첫마디가 그랬다.
내가 담뱃갑을 던지면서 겨우 말했다.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근데…불이 없어.불이….』 『부엌 식탁위에 성냥이랑 재떨이가 있을 거야.』 계집애는 꼼짝도 않고 말했다.나는 부엌에서 성냥과 재떨이를 갖다가 그애 앞에 놓아주었다.성냥불을 켜고 담배에 불을 댕기는 계집애의 손놀림이 능숙했다.성냥이 타는 동안,그애의 퀭한 눈빛이 드러났고,긴 잠옷 아래로 삐져나온 두발의발 톱에 칠해진 빠알간 매니큐어가 보였다.
『말해봐,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니 친구들이 부탁했어.널 자기네들 집에 데리고가서 재울 입장이 못된다고 그랬어.』『미안해,많이 취했었나봐.많이 마셨거든,어젠 좀…기분이 그랬어.』 『괜찮아… 어제 하루만 그런 거라면 다행이네 뭐.』 그애는 아무 느낌도 없는 계집애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넌…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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