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멋진 레토릭(修辭)이 곳곳에 따라붙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서문을 보자. "하나의 유령, 즉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서'분위기를 영락없이 패러디했다. "컴퓨터 시대는 끝났다. 지난 30년 PC 혁명은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길거리를 덮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 PC시대의 거인들은 여전히 주위를 배회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은퇴해 자식 자랑을 낙으로 삼게 될 것이다."
길더의 전망으로는 마이크로칩 시대는 이제 통신의 시대 쪽으로 옮긴다는 것인데, 따라서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무시하지 못할 적실성(適實性)을 갖는다. 그게 이 책의 두번째 매력이다. 즉 저자 본인이 "텔레코즘(통신기술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한 한국의 통신산업에 각별한 애정이 있다. 꽤 공들인 '한국어판 서문'제목이 이렇다. "한국이여, 기회를 움켜쥐어라."
책을 보면 길더와 빌 게이츠는 세상을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금세 알 수 있다. 게이츠가 데스크 톱만을 쳐다본다면, 길더는 네트워크 쪽을 바라본다. 네트워크야말로 PC의 핵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가리킨다. 즉 길더는 광학기술과 무선인터넷 기술을 통해 최근 몇년 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통신속도(대역폭의 체증)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길더 표현으로는 "텔레코즘 시대는 컴퓨터 시대의 환상적인 풍요마저 빛을 잃게 하는 새로운 풍요"다. 시공을 넘어선 이 세계에서 인간은 마치 천사처럼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게 된다는 전망도 내놓는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열렬한 어조다. 사실 이 책은 과학 이야기이자, 이 새로운 물결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영웅 스토리'이기도 하다. 놀라운 점은 그가 세제(稅制) 전문가 출신이라는 점이다. 레이건 시절 정책 보좌관이었던 그가 테크놀로지 세계에 눈을 뜬 것은 나이 40 이후다. 미국에서 2002년에 첫선을 보였던 이번 신간의 곳곳에 보이는 미국 엘리트들의 지적 능력과 효과적 글쓰기 실력만 건져도 본전인 텍스트다.
조우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