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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지를 찾아 삼만 리, 로케이션헌팅(location hunting) 매니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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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대관령의 양떼 목장에서부터 전남 순천의 달동네까지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사나이. 보아하니 그저 평범한 여행객은 아니다. 매서운 눈빛으로 구석구석 관찰하는 폼이 심상치 않고, 차 안에 수북이 서류더미들이 쌓인 게 범상치 않다. 서류더미들 사이로 영화 시나리오가 삐죽이 삐져나와 있다.
이 남자,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그는 자신의 정체를 ‘로드헌터’라고 밝힌다. 이름은 백현익. 그는 크랭크인을 코앞에 둔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돌아온 다찌마와 리>의 촬영지를 찾아 대한민국 곳곳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지는 중이라고 덧붙인다. 주요 배경이든 그저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골목길 하나든 영화 속의 공간적 배경들은 꽤나 지난하고 힘겨운 ‘사냥’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영화에 딱 알맞은 길을 골라내는 게 길 사냥꾼 백현익 씨의 일. 따라서 보기에도 좋고 걷기에는 더 좋은 길에 관해서라면 그도 이제 도가 텄다.
백현익 씨에게서 ‘좋은 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WH- 현재 류승완 감독의 <돌아온 다찌마와 리>의 촬영지를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확히 로드헌터란 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백- 로드 헌터는 영화에 가장 어울릴 만한 장소가 나타나서 ‘필이 꽂힐’ 때까지 줄기차게 돌아다녀야만 하는 사람이다. 특히 류 감독이 깐깐한 성격이라 엄청 돌아다녀야 한다. 류 감독만 그런 성격인 건 아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게 잘 맞아서 그런지 초창기부터 류 감독과 작업을 같이 해오고 있다. 이번 영화 12월에 촬영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올해 봄부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출장을 떠나는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도 걸린다.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이 잡듯 뒤지고, 몇 군데 장소를 체크해 뒀다가 감독과 함께 다시 쭉 돈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하면 한 두 곳씩 촬영 장소가 정해진다. 영화 장면에 필요한 장소를 다 오케이 사인할 때까지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 그만 하랄 때까지 계속 장소를 찾아야 한다. 12월에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아직도 안 끝났다. 다른 인력까지 투입해서 샅샅이 뒤지는 중이다.

<돌아온 다찌마와 리>는 2000년에 나왔던 <다찌마와 리>의 극영화 판인데, 사실 <다찌마와 리>가 제일 많이 돌아다닌 작품이었다. 하도 여러 번 제작 계획을 접었다 폈다 하는 통에 헌팅 기간도 늘어져서 그렇게 됐다.

WH - 지금까지 돌아다닌 장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곳은 어디인가?
백 - 당신도 목장 사진을 좋아하나보다(목장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기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뜨끔했다). 사진으로만 보면 푸르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로 총천연색이 가장 눈에 띌 거다. 하늘과 초원이 잘 어우러진 목장 사진은 다른 사람들도 꽤 많이 좋아하더라.
그런데 영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강렬한 색채의 조화로움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대한 감정이다. 영화인들의 우수라고 해야 할까…. 예를 들면, 허름한 달동네의 경사 급한 길이나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온 가로수 길처럼. 사람의 마음을 적셔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때 아름답다고 느낀다.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장소가 있는데 그럴 때 ‘아, 아름답다’ 그런다.
돌아다니다보면 정말 필이 딱 꽂히는 장소가 있다. 그런 곳이 나타나면 마음이 막 설렌다. 그런데 이게 또 문제다. 내가 설렌 길에서 류 감독이 설레지 않거든. 이상하게도 꼭 그렇더라. 이제는 그게 완전히 징크스처럼 됐다. 내 맘에 드니까 류 감독은 별로 안 좋아 할라나 싶은 생각도 자주 한다.(웃음)

WH - 그래도 어쨌든 여행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까 마냥 부러워 보이기도 한다. 나름대로 장점, 단점 다 느낄 텐데 말해 달라.
백 - 사실 여행을 많이 한다는 건 부수적인 보너스일 뿐이다. 영화 촬영지를 직접 수소문하고 내 손으로 맘에 드는 장소를 골라내는 건 영화 제작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여행이 아니라 일이다. 이게 바로 영화 미장센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면 시나리오가 좋고 배우가 암만 뛰어나도 소용이 없게 된다. 장소를 결정한 순간에야 비로소 감독도 배우도 모든 걸 쏟아낼 무대를 갖게 되는 거다. 그러니 당연히 부담이 크고, 그런 만큼 자부심과 매력도 크다. 이 일이 묘해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다 공존한다. 사실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니까 새로운 것을 보고, 먹고, 경험하면서 일할 수 있다. 새로움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또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공허함 같은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는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대면하더라도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른다. 그래도 시나리오 나오면 또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고 하는 걸 보면 딱 내 천직인 것 같다.

WH - 다녔던 길 중에서 사람들한테 여행지로 추천할 만한 길을 추천해 달라.
백 -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길이 있다. ‘몽탄’이라는 곳인데, ‘꿈여울’이라는 뜻이라더라. 전라남도의 작은 마을인데 연고 없이 다녀오기엔 다소 정처 없기도 하지만 그쪽 지리에 조금만 익숙하다면 가볼만 한 곳이다. 마을 이름 정말 잘 지었다. 정말 꿈여울에 들어선 건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용하고 맑은 곳이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을 사람들이 조그맣게 경작하는 논밭이 있고, 황소도 한두 마리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 기슭을 돌아봤는데 저수지랑 바다가 보이더라. 정말 경치 끝내주더라. 지금쯤 아마 철새들이 한창 날아들 거다.
개인적으로는 충청북도 공주도 여행하기에 좋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딱히 역사 도시라 그런 게 아니고 공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상당히 매력적이다. 한없이 여유롭고 너그러운 곳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서 처음 버스를 탔을 때 굉장히 놀랐는데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도시 사람들은 난폭하게 운행하는 버스나 총알택시에 익숙하다. 그런데 공주에서는 버스도 여유롭더라. 승객이 버스에 타서 의자에 안전하게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조심스럽게 출발하더라. 정말 감동 ‘먹었다’. 이런 사람들이랑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게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라서 지금도 그런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아무튼 그때 그 기억이 잊히질 않는다.
홍천의 스트로브 잣나무 숲도 좋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소풍삼아 다녀오기에 괜찮다. 아, 물론 내가 추천하는 여행지는 위락시설의 개념의 없으니 그 점은 참고하시라.

WH - 마지막으로 로드헌터로서 하고 싶은 말은?
백 - 나는 영화를 봐도 주로 액션영화를 본다. 스토리나 액션을 보는 건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방식이고, 나는 배경과 길,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장소 등에만 신경이 곤두선다. 직업병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직업병’이다. 헌팅 매니저로 갖는 바람은 늘 한 가지 뿐이다. 내가 찾은 공간이 부디 영화의 완성도에 조금이라도 더 기여했으면 하는 것. 정말 고생해서 찾은 장소는 내 새끼처럼 소중하다. 그게 편집돼 잘려나갈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다. 전국 방방곳곳 셀 수 없이 많은 길이 있지만 내가 서 길 하나가 곧 나의 꿈이자 미래다.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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