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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詩는 비밀 해독하는 아름다운 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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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나 감각도 자체로 존재하는 주체이자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다. 내 시는 그 사소한 존재들의 비밀을 해독하는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기호로 아름다운 지도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다."

배용제(41)씨가 7년 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이 달콤한 감각'을 해독하는 단서는 시집 뒤 표지에서 찾아진다. 사건과 감각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시선을 염두에 두면 시집 전체를 꿰뚫는 큰 그림 없이도 60편을 읽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다.

'한방울의 고통'은 남녀의 만남과 이별이 일회용이 되고 마는 현실을 낯선 상상력으로 비꼬고 있다.

애인이 떠나자 시의 화자는 "갑자기 약지손가락이 생인손을 앓는다." 그런데 떠난 애인은 사용기간을 넘겨 폐기처분된 실습용 애인이었다. 그런 애인을 쓰다듬었던 손길이 진정했을리 없다. 날림으로 조립된 애무에 애인은 덜커덩거리며 반응했었다. 애인이 여럿이었음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음 순간 일회용 애인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려 하자 수많은 감촉이 뒤범벅돼 통증이 일지만 그까짓 고통쯤 화자에게는 기껏 한방울도 안 되는 것이다.

'명품(名品)'에서는 명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에 "여자로 만들어진 울음통"을 대비시키고 있다.

로키 산맥 수목한계선의 나무로 만든 18세기의 걸작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뼛 속까지 스며든 한기와 어둠과 공포의 기억들"을 지닌 채 "팽팽히 조여진 목숨 줄을 스칠 때마다/부드럽고 격렬한 울부짖음"을 운다. 반면 생의 한계선에서 다듬어진 싱싱한 여자로 만들어진 울음통, 즉 여자의 울음소리는 "기억을 토해내는 동안/어느새 몸은 다 비워지고/그저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만 공명하는 울음통"이 된 것이다.

'점치는 여자' 연작은 통찰과 간명한 정리로 빛난다. 점치는 여자는 몇 톨의 쌀을 뿌려놓고 손가락 끝으로 내 지난날을 더듬고, 아직 씌어지지 않은 내 삶의 줄거리까지 거칠게 흥얼거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내 이정표들은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태지만 그 앞에서 내 영혼은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싶다.

시간에 대한 시인의 성찰은 '화석'같은 시에서는 사람에서 공룡으로, 공룡에서 다시 고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계통 발생, 그 아득한 연대기에까지 이른다. '저 별빛'에서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 별빛은 "수수억년 전부터 이 순간을 예정하고" 눈부신 폭발로 거행되었던 것이고, 생의 충격적인 장면들도 오래 전 준비된 필름일 것이다.

'향기에 대한 관찰'은 부패 속에서 향기가 피어난다는 역설적인 철학을 담고 있다. 경계가 모호해지는 부패의 꿈 속에서는 날카로운 것들과 망가진 것들이 함께 눈부신 풍경을 이룬다. 풍경은 오히려 망가질수록 황홀해진다. "젖은 쓰레기 더미 위에서/치자꽃 무리가" 피는 그 곳에서는 새들 속에서 잡동사니가 울고 나뭇잎 속에서 고철이 펄럭인다.

시인의 시선은 '전족''버려진 의자''알코올 중독자''울고 있는 아이''불면증''자폐아''파출부''살과의 전쟁' 등을 '아름다운 지도'의 목록에 포함시킨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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