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과거의 상처 담은 여덟가지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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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한동림(36)씨가 등단 9년 만에 첫 소설집 '유령'을 펴냈다.

등단작 '변태시대'를 포함,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은 오랫동안 진행돼온 한씨의 소설적 모색을 보여준다.

'피어나는 산'은 예술가 소설에 가깝다. 주인공 평섭은 한눈 팔지 않고 한 십년 정성을 쏟으면 도인(道人)은 못 되어도 달인(達人) 소리는 듣게 될 거라는 말을 믿고 16년째 전국을 떠돌며 불상 깎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흔을 눈앞에 두고 드는 생각은 너무 먼 곳으로 떼밀려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주문받은 불상 제작이 끝나면 당장 남은 겨울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은 형편이고 그윽한 눈매, 모나지 않은 코, 단아한 입술 등 판에 박은 모습을 맹목적으로 깎아나가는 조각 작업은 식상할 뿐이다.

겨울비가 뿌리던 날 밤 평섭과 장영감의 작업장인 헛간에 묘령의 여인이 나타난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오느라 탈진한 여인은 정신을 차리자 눈이 내리면 산봉우리가 꽃처럼 피어난다는 백화산에 데려다 달라고 사정한다. 백화산은 실재하지 않는 산이다. 여인과의 승강이 끝에 여인의 맨 가슴에 머리가 파묻힌 평섭은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 후 정신없이 조각에 몰두한다. 이튿날 여인은 온데간데 없고 여인을 빼닮은 잘 생긴 불상만 남아 있다.

'피빛 바다'는 사이코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어린시절 잦은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명한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이 돼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상담과 과거 회상을 통해 드러난 진실은 명한이 어린 시절 살해했다고 믿어온 아버지는 버젓이 살아 있고, 같은 폭력의 피해자로 의지 대상이었던 형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가출하는 바람에 헤어진 후 성인이 돼 다시 만난 형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 같은 폭력적인 가장이 돼 있었던 것이다.

'조난'은 끝내 바위 덩어리를 정상으로 끌어올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굴려올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시포스의 신화에 빗대 산사람들의 세계를 실감나게 그린 산악 소설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 내 끈덕지게 되새김질하는 작업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뒤로 미뤄둘 수는 없는 일이다. 착란은 바로잡혀야 하고 인생이라는 산의 등정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씨는 소설가 한승원씨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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