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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어차 81년 만에 행차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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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순종황제가 타던 어차(御車)가 28일, 당시 황실 경호를 담당한 근위기병대 복장을 재현한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창덕궁에서 경복궁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김성룡 기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어차(御車)가 28일 서울 도심 번화가 행차에 나섰다. 그의 서거 후 81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서울 시민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등록문화재(제318, 319호)인 어차는 미국 GM이 1918년 제작한 캐딜락과 14년 식 영국 다임러 리무진이다. 세계적으로 각각 넉 대와 한 대밖에 남지 않은 희귀 차다. 조선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 장식이 박힌 검붉은색은 당시 모습 그대로다. 어차는 오랫동안 창덕궁 창고에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됐다. 92년 일본의 한 자동차 전문가가 우리나라 문화재 당국에 "내가 한번 복원해 보겠다"고 신청한 것을 계기로 복원 논의가 불붙었다. 관계 당국이 머리를 맞댄 끝에 '어차는 우리 손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현대자동차가 사회 공헌 차원에서 복원에 나섰다. 이 회사는 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이들 어차를 창덕궁에서 경기도 화성 남양연구소로 옮겨 대수술에 들어갔다. 옛 도면을 찾느라, 마땅한 부품을 만드느라 10억여원을 들여 복원을 완료한 게 2001년으로 5년 가까이 걸렸다. 이번에 경복궁 전시관으로 차를 옮기면서 기념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날 어차 퍼레이드는 창덕궁 어(御)차고에 보관해 온 순종 황제.황후의 관용차 두 대를 경복궁 내 국립 고궁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이벤트로 꾸민 것이다. 어차를 실은 특수 트레일러는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종로통과 세종로를 거쳐 약 3㎞를 달렸다. 황실 근위대 복장의 기마대와 보병대 100여 명이 이를 호위해 구한말 분위기를 살렸다. 복원 과정엔 흥미로운 일화가 많다. 우선 도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GM과 다임러 본사에 문의했지만 모른다는 회신이 왔다. 연구원들이 해외 출장에 나서 1년간 수소문한 끝에 미국 캐딜락박물관과 영국 다임러박물관에서 간신히 도면을 찾아냈다. 당시 파워트레인 연구소장으로 복원 작업을 지휘한 현대차의 이현순 사장은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명차 회사들에 한 수 배웠다"고 말했다. 부품도 대부분 단종돼 엔지니어들이 직접 손으로 깎아 만들었다. 현대차 연구원들은 "100년 전 자동차 기술의 정교함에 감탄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어차들은 달릴 수 없다. 엔진과 변속기가 옛 것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현순 사장은 "엔진과 변속기까지 다 바꾸면 우리 마지막 황제가 타던 차라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고심 끝에 결론지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이들 어차를 다음달 28일 재개관하는 경복궁 고궁박물관 1층 중앙홀에 전시한다. 한애란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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