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이익 0" … 적자 시나리오 쓰는 기업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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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신고가를 갈아 치우는 유가 때문에 국제 원유시장의 트레이더들도 애간장이 탄다. 26일(현지)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원유 트레이더들이 앞다퉈 주문을 내고 있다. 이날 WTI 12월 인도분 선물가격은 전날보다 배럴당 1.4달러 오른 91.86달러를 기록했다. [뉴욕 AP=연합뉴스]

25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윤종용 부회장 주재로 핵심 경영진이 모두 모인 경영전략회의가 열렸다. 유가 급등과 환율 급락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된 긴급회의였다. 삼성이 내년 최악의 시나리오로 잡은 '유가 100달러, 환율 800원'이 훨씬 빨리 코앞에 다가선 것이다. 회의장에는 긴박감이 넘쳐 흘렀다.

"당초 내년 환율을 900원대 초반으로 잡았었다. 이런 추세라면 800원대 후반으로 수정이 불가피하다."

"원-달러 환율이 1050원에서 950원대로 떨어지면서 이익이 1조5000억원가량 줄었다. 만약 환율이 800원대 후반까지 떨어지면 충격은 더 클 것이다."

◆'적자 경영' 각오=국내 간판기업인 삼성전자조차 고유가.저환율의 쓰나미에 휩쓸려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 몇몇 업종과 기업들은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겁을 먹은 표정이다. 수출 기업과 유가에 민감한 업종을 중심으로 '내년엔 이익을 전혀 못 내거나 적자 경영이 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난 3~4년 동안 초호황을 누려 온 현대상선.한진해운 등 해운업계는 내년에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어서면 적자로 반전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유가에 민감한 항공업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올 초 경영계획에 배럴당 63달러로 전망했다"며 "두바이산 기준으로 유가가 85달러를 넘어설 경우 1500억원가량의 추가 비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항공업계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수익성 없는 노선을 과감히 없애는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투기자본이 휘젓는 원유시장=국제 원유가격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돌파하고 있다. 거대 투기자금이 달러화 약세를 피해 국제 원유시장에 몰리고 있다. 국제 원유가격은 서부 텍사스중질유(WTI) 기준으로 배럴당 91달러, 두바이유는 82달러를 넘어섰다.

26일 새벽 미국 뉴욕의 국제원유 선물시장. 동 트기 직전의 한산하던 시간외 거래에 갑자기 거액의 뭉칫돈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10만 배럴 단위의 '묻지마 사자' 주문이 쏟아졌다. WTI 3개월짜리 선물이 곧바로 배럴당 92달러 초반까지 치솟았다. 저항선으로 여겨져 온 90달러 천장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몇 분 뒤에는 터키 군대가 쿠르드 무장세력을 공격한다는 보도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에서 이탈리아 원유 기술자가 납치됐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지난여름 무렵부터 1회당 원유선물 주문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대형 헤지펀드 자금들이 원유시장을 휘젓는 흐름이 뚜렷하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7일 미국의 선물거래업체인 아라론 트레이딩 담당자의 발언을 인용해 "서브프라임 모기지(신용이 낮은 개인에게 고금리로 빌려 주는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 이후 헤지펀드들이 주식과 채권을 팔아 치우고 원유나 금 등 국제 상품시장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헤지펀드의 움직임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10월 들어 투기자본들의 유가선물 매수 잔액은 다시 1억 배럴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 올 4월 투기자금의 1차 매수 때는 배럴당 60달러 선이 뚫렸고, 7~8월의 2차 매수 때는 배럴당 70달러 선을 가볍게 돌파했다.

CFTC는 이에 따라 국제 상품시장에서 헤지펀드들의 시세 조종을 막기 위해 거래 상황 보고를 의무화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멈추지 않는 달러 약세=이런 악순환에 쐐기를 박으려면 미국 달러화의 강세 전환이 급선무다. 하지만 달러화 약세는 진정될 기미가 없다. 달러당 원화 환율은 26일 909.90원으로 10년래 최저치를 기록한 데 이어 주말에는 장외(NDF)에서도 추가 하락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31일 금리를 추가 인하할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미국 경기가 침체 조짐을 보이면서 FRB가 금리를 내릴 것으로 관측된다"며 "고질적인 미국의 쌍둥이 적자(거액의 무역수지적자와 재정적자)를 감안하면 달러화 가치는 내년까지 하락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표재용.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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