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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李禹煥 초대展-이우환.이어령 대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李御寧=오랜만입니다.처음 만난 것이 아마 67,68년께 내자호텔 커피숍이었던가요.
李禹煥=李선생님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李御=처음 만났을 때 李선생이 대뜸 나에게『띄어 쓰기에 대해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봤었지요.국문학을 전공한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띄어 쓰기를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李禹=띄어 쓰기는 서양 알파벳이 뿌리입니다.서양에서는 물리적스페이스가 제공돼야 문맥이 통하지만 한글을 비롯해 한자.일본 가나(假名)등은 모두 띄어 쓰기가 없어도 전체의 관계 속에서 말의 의미가 전달됩니다.그때 저는 사물들의 관계 에 대해 한창생각할 때였습니다.
李御=예전 우리 할머니.어머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한글서간에서 쉽게 문맥을 알아차렸습니다.李선생의 질문을 받고서 우리민족의 마음 속에는 어떤 내면적 스페이스가 이미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한국문화의 한특징이라고 생각했지요.
李禹=관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된 것은 일본에서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 접했던 서양 모더니즘이 한계에 부닥친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서양의 실패가 모든 대상을 물리적 해체를 통해 자아 속에 집어넣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들었지요.
李御=언젠가 일본 미술잡지『藝術新潮』가 戰後일본작가 베스트 10을 뽑았는데 그들 중의 상당수가 이우환씨 이론과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쓴 글을 봤습니다.국내에서는 잘 모르고 지나간 일이지만 나 자신은 그 글을 읽고 한국작가가 일본 현대미술사의방향을 바꿨다는 사실에 무척 흥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李禹=60년대 일본미술에 등장한 모노파 이야기군요.서양미술의역사는 크게 두가지로 볼수 있습니다.하나는 개인의 자아를 통해대상을 완전히 분해,재구성해서 인간의 것으로 정교하게 재현해내는 작업입니다.또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자아가 대상을 정복하려 해도 사물은 인간화.관념화 될수 없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대상과자아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작업입니다.일본미술이 그때까지前者에 치우쳤다면 저를 포함한 모노파는 後者를 주장한 것이지요. 李御=한때는 일본 정신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우환이 혹시 일본적 토양에서 성장해(李씨는 서울大미대 1학년때 渡日했다)그런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그러나 그후 일본현대미술을 뒤바꾼 이우환의 영향은 우리 민족의식 내부에 오랫 동안 잠재돼온 그 어떤 문화적 유전자의 역할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李禹=지난 88년 李선생님이 일본에서 발표한「보자기문화의 포스트모던」이란 글과 관련 있는 말씀인가요.
李御=그렇습니다.접기에 따라 삼각형도,사각형도 되는 보자기야말로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서 가변성과 능동성을담은 한국문화의 대표적 원형이라고 생각해왔는데 李선생 작품에서말과 글로만 떠들던 내 주장의 증거를 찾았다 고 할까요.
李禹=저는 항상 작품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물,즉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의 창작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의식 의 집합체,즉 관념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李御=그래서인지 李선생의 작품을 보면 엄청난 긴장감을 느낍니다.그 앞에 서면 마치 쨍 소리가 날 정도로 정적이 감도는 여름날 모든 사물이 고요하게 정지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돼요.
李禹=그것은 의식적으로 현실과 관념의 긴장관계를 증폭시킨 까닭이겠지요.
李御=李선생 작업은 처음 점의 반복에서 시작해 점의 연장인 선,그리고 보이지 않는 리듬인 바람.공간등이 차례로 나타나면서점차 의미없는 공간의 역할이 커지고 상대적으로 의미있는 행위의결과인 점이 줄어드는 역전현상이 일어나는데 어 떤 정신적 과정이 있었습니까.
李禹=결과론적인 이야기인데 붓에 물감을 묻혀 연속적으로 점을찍다보면 색감의 차이가 저절로 나타납니다.이런 반복과 차이로서그동안 제 작업의 테마인「無限」을 표현해 왔습니다.어느날 갑자기 이 작업이 이미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을 화 면에 옮기는 것아닌가하는 회의가 느껴지면서 그럴바엔 차라리 현실과 관념 사이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벌려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李御=조각도 그 연장인 듯한데 李선생 조각은 어울리지 않는 사물의 조합이란 점에서 솔직히 처음에는 배신당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쇠는 마음대로 되는데 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李선생 말을 듣고 불현듯 철판은「문화화된 돌」「가축화된 돌」이란 생각이 들면서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물체인 철판과 지배할수 없는 사물인 돌이 인간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 열려진 관계를암시하고 있는 작업이다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李禹=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됐지만 아무튼 멋진 해석입니다.제 작품은 유럽에도 많이 소개됐는데 재미있게도 찬반이 엇갈립니다.
한번은 누군가가『이 돌은 당신 말을 잘 듣는가』고 물어보더군요.그래서『잘 안듣는다』고 했더니『그러면 당신 작품 은 아직 미완성』이란 말을 하더군요.
李御=서양문명의 세례를 많이 받은 우리 관객도 李선생 작품을그렇게 볼수가 있겠군요.저는 이번 국내 전시를 계기로 누구나가李선생 작품 앞에서 한 10분만 멈춰 설 것을 제안합니다.
李禹=바쁘신 가운데 제 작품을 꼼꼼히 보아주시고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2일 개막식에 정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정리=尹哲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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