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를찾아서>"여성의 신비"저자 베티 프리던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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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여성의 신비』를 쓰던 당시 베티 프리던은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가끔씩 여성잡지에 생활기사를 기고하던,40대의평범한 중산층 고학력 가정주부였다.명문여대인 스미스 대학을 졸업한 그녀의 이같은 경험이 바로 이 책을 배태시 킨 토양이었다.그녀의 경험은 바로 비슷한 배경을 가진 수많은 중산층 여성들의 경험이었으며,따라서 프리던은 그들과 상관 없는 여성해방의 투사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병을 정확하게 진단해준 치료사로서 순식간에 떠받쳐졌다.
지난 73년 출간 10년을 돌아 보는 글에서 프리던은 지난 10년 동안 여성운동은 그 권력이나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그녀의 모든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하고 있다.개인적으로 그녀는 결혼생활과 여성운동의 긴장 사이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69년이혼하게 된다.
『여성의 신비』가 출간되자마자 온갖 종류의 매스 미디어가 그녀를「현대여성운동의 어머니」라고 명명했으며,그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64년 NOW(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an:全美여성기구)를 창설,초 대회장으로 여성운동을 이끈다.동등권 수정법안 운동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여성을 조직화하고,68년에는 코넬 대학에 처음으로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는데 공헌한다.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프리던은 NOW초기만 해도 급진주의에 경도되는 젊고 과감한 여성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그러나「성의 정치학」을 피해야 한다는 프리던과 정반대 입장에 선 젊은 여성들과의 밀월은 길지 못했다.
케이트 밀레트와는 동성연애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등을 돌리게 된 프리던은 70년 글로리아 스타이넘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자 NOW를 떠난다.『나는 여러분을 역사 속으로 끌어 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남겨 놓고 떠난다 .나는 새 역사를 만들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상처를 입었다.그러나 이 갈등은 반드시 신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라기보다는 세대 차이가 빚어낸 몫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하버드.예일.컬럼비아.남가州대학 등에서 강의와 연구 생활에 몰두하면서 프리던은 초기의 신념에서 상당히 후퇴한 듯 했으며 때로는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듯 했다.75년「세계 여성의해」를 맞아 보부아르를 찾은 프리던의 회견기에는 그런 감정들이생생히 그려져 있다.77년에는『스프 끓이는 곳으로 돌아 간다』는 선언과 함께 여성해방과 결별을 고하는가 하면 80년대에는 손자 돌보기에 흠뻑 빠져 있는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매스컴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녀가 81년 펴낸『제2단계』(The Second Stage)는 후배들의 격렬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반격-여성들에 대한 포고되지 않은 전쟁』(1991)에서 수잔 패러디는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자기가 공들여 쌓은 탑을 스스로 무너 뜨리는 짓을저지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프리던의 이 책이야말로 여성해방이라는 대의에 가장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고 비난했다.
프리던은 이 책에서 초기의 여성운동가들이 모성적 사명을 소홀히 다뤘으며 가족을 고려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반성하고,특히 급진주의자들이 강간에 대해 지나치게 매달렸다고 비난했다.
여성운동가들이 남성의 세계에 접근하는데 사로잡힌 나머지「남성과여성의 차이」를 인정하고「여성적 감수성」을 찬양하는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가족의 재발견.개인적 책임감.공동체사회에 대한 자원봉사 등을강조하는 제2단계로의 진입이야말로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전략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이것을 여성해방 대의로부터의 후퇴라고 단순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성급한 판 단일 듯 싶다.왜냐하면 약간은 일관성이 결여된 그의 이 책에는 여전히 초기에 내세웠던 여성해방의 원칙이 지워지지 않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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