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young파워] 미국 리더들 녹인 한국 고교생 오케스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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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 연주 투어에 나선 서울예고 오케스트라 학생들. MIT에서의 연주를 마친 뒤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은 MIT 학생 신종우씨가 찍었다.

19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하버드대의 450석 규모 공연장 페인 홀(Paine Hall). 바이올린·첼로 등을 손에 쥐 한국의 10대 청소년 24명이 무대에 올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 서울예술고등학교 오케스트라단원들이다. 음악도라고 해도 이처럼 어린 고교생들이 해외 명문대학의 무대에 서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다. 이들은 이 날 공연을 시작으로 매사추체스공대(MIT), 뉴잉글랜드·바드 콘서바토리 등 미국 동부지역 4개 대학을 순회하는 11박12일간의 연주투어에 들어갔다.

 이번 투어를 기획한 것은 지휘자 금난새(60·유라시아 필하모닉 음악감독)씨. 어린 학생들이 해외관객과 일찌감치 만나 시야를 넓히게 하는 한편, 현지 관객들에게 한국 젊은이들의 발랄한 힘을 보여주자는 취지다. 대학을 중심으로 연주일정을 짠 것은 미국 내 리더들의 문화가 집약돼 있는 곳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각 대학은 어린 오케스트라의 가능성을 보고 공연장을 내줬다. 학생들은 지난 4월부터 반년남짓 정규수업시간 전후로 별도의 연습시간을 가지면서 이번 투어를 준비했다.

 그런 준비에도 첫 해외무대는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현지에 마땅한 연습실을 구하지 못해 한인교회를 빌려 화음을 맞췄는가 하면, 호텔방에서도 소리를 죽여가며 밤늦도록 개별연습을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좋은 연주가 곧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말이다.

 하버드대에서 첫연주를 시작하기 전 지휘자 금씨는 관객을 향해 “1700년대에 만들어진 악기를 갖고 미국을 찾은 17세 아이들에게 박수를 부탁한다”며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줬다. 연주를 거듭할 수록 현악기의 울림은 한결 예리했졌고, 오케스트라 전체의 호흡도 맞아갔다. 이번 공연의 진행을 도와준 제임스 야나토스(음악학 교수)는 “우리 학교에서 외국 고교생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처음”이라며 “한국음악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현지 관객 크리스 히르시 부부도 “한국 젊은이들의 연주를 처음 들었는데 수준이 놀랍다”고 말했다.

 20일 MIT 연주에서는 1100석 규모의 객석이 80% 이상 메워질 정도로 관객들의 관심이 더해갔다. 마지막곡 차이콥스키의 세레나데가 끝나자 기립박수가 터졌다. MIT 재학생 켈리 크레이그는 “단원들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 놀랐다”며 “명문 대학들을 순회하며 연주할만큼 좋은 실력의 고교생 단원들을 갖출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투어기간 동안 학생들은 현지 연주자들로부터 공개레슨도 받았다. 21일에는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보로메오 4중주단이 공개레슨을 했다. 무대에서와 달리 지휘자 금씨는 “지적당한 부분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선생님과 싸워야 한다”면서 학생들에게 매서운 모습을 보였다.

 이번 투어는 행사취지에 공감한 삼성테스코와 금호아시아나가 후원을 맡았다. 현지 한인학생들도 힘을 보탰다. 특히 MIT 한인 학생들은 교내 공연장 섭외와 음향·조명, 관객들에게 프로그램을 나눠주는 일 등을 자원해서 도왔다. 삼성테스코 이승한 사장은 “한국의 젊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국가 브랜드 가치상승과 직결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예고 오케스트라는 앞으로 이 투어를 매년 정례화할 예정이다.

보스턴=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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