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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3.실종 ○31 천호동의 텍사스 골목에서 어쭙잖게 봉변을 당하고 온 며칠 뒤였다.서울역 근처의 커피숍에서 다꾸와 만났다가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버스의 차창 쪽에 앉아서 흘러가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데 괜스레 울적하였다.
「…그렇지요,거기에 미치고 나면요,처음엔 자기자신이 파괴됩니다.일상적으로 지켜오던 세상의 모든 규칙이나 질서가 다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겁니다.일반적인 가치기준이 한꺼번에 깨져버리는 거지요.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정상적으로 어울리는 것도 다 성가시게 여겨지구요….」 버스의 라디오에서 어떤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그래,사랑이라는걸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음엔 가정이 파괴됩니다.가족들 하고도 어느새 벽이 생기기 시작하니까요.비밀이 생기고 자꾸만 거짓말을 하게 되구요,그러다 보니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도 피하게 되는거지요….」 아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 거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나는 어머니에게 무어라고 말해야할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써니를 찾아보러 대흑산도에 다녀오겠다고 하면 어머니는 까무러치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눈두덩의 퍼런 멍 때문에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어지간히 켕긴게 아니었다.내가 창녀와 단둘이 여관방에 있었다는 걸 안다면 어머니는 아마 너무나 더럽다고 나를 피하실 거였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우리사회를 파괴하게 되는 겁니다.눈앞에서 다른 게 어른거리는 판에 회사에 나가서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학교에 가서 공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라디오의 남자는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법으로 그놈의 사랑같은 걸 못하게 막으면 될 게 아니냐고 나는 생각했다.사랑에 빠진 것같은 표정을 하고 거리를 가는 젊은이들은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가두는 거다.아니면 어느날 갑자기 전투경찰들을 일제히 풀어서 일망타진해 버리든가.혹은「사랑 자수기간」같은 걸 설정해서,자수를 해온 사람들에게는 나라에서 정상인이 될 때까지 격리치료를 해줘야 할 거였다.에이즈 환자들에게 그러듯이,사랑에 빠진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부로 관계를 갖지 못하게 막아야 할 거였 다.
「…오늘은 도박의 폐해에 대해서,단도박 모임 회원들을 모시고알아봤습니다….」 집에 와서 배낭을 꾸리는데 어머니가 계속 잔소리하셨다.
『글쎄 고3이 되면 여행도 못가잖아요.이번 여름이 고등학생으로서는 마지막 여행이라구,영석이네 집에선 부모들이 더 난리를 쳐서 푸케트인가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는데 참….』 『너 막내 이모한테 가서 돈도 가져갔다며.그것도 한두푼도 아니구 20만원씩이나…혹시 또 써닌가 그애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냔 말이야.
며칠전에 한 말도 거짓말이라는 거 엄마가 다 안다구.』 아 하여간 스무살이 넘은 인간들은 몽땅 한통속이라는 상원이의 말이 맞았다.막내 이모까지 벌써 내통하고 있는 거였다.
『이젠 나두 어린애가 아니잖아,엄마가 다 알려구 하지 말라니까요.나두 정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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