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동영 외판사원’ 부활의 드라마를 쓰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호 04면

18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만난 이상호씨는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42세인 그는 “30∼40대가 하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 못하는 것 중 1위가 귀걸이란 보도를 보고 2년 전 귀를 뚫었다”고 말했다. [사진=신동연 기자]

노사모 출신인 이씨는 본명보다 ‘미키 루크’라는 인터넷 아이디로 더 유명하다. 1980년대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에서 따왔다. 보통 그냥 ‘미키’로 불린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위해 혼자 5800명의 선거인단을 모집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정동영 승리 숨은 주역 이상호 전 캠프 홍보기획단장

당시 경선에는 정동영 후보도 참여했다. 정 후보의 오랜 참모인 황세곤(53)씨는 “5년 뒤 경선·대선에서 우리가 이기려면 미키를 꼭 합류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결국 내 생각이 옳았던 셈”이라고 말했다. 정 후보 캠프에서 전략기획위원장을 맡았던 민병두 의원도 “미키가 (경선 승리의) 일등 공신”이라고 말했다.

정 후보 캠프에서 이씨가 했던 역할을 알려면 우선 그의 이력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그는 부산에서 고교를 마치고 85년 군에 입대했다. 육군 공병부대에 배치된 그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선거에 눈을 떴다. 고참병들의 횡포에 맞서 내무반장 직선제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후임병들의 압도적 지지로 내무반장에 ‘당선’됐다. 사람들의 욕구와 열정을 조직화해내는 방법을 이때 처음 배웠다.

제대 후 부산의 한 백화점에 입사한 그는 이후 10년간 백화점 각 매장을 돌며 마케팅을 배웠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매출 실적을 끌어올렸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직접 회사를 차렸다. 시장 공략에 실패한 양말·의류를 헐값에 사들여 브랜드를 회생시키는 일을 했다. 불과 1년 만에 연매출 수십억원대 회사로 키웠다.

그는 백화점 근무와 회사 경영을 통해 배운 기법을 훗날 노사모 국민경선대책위원장으로 일할 때 톡톡히 써먹었다. 선거인단 모집용지를 백화점 상품권 관리하듯 일일이 번호를 매겨 배포하고 회수했다. 그리고 영업·판매사원을 교육하듯 열성 지지자들에게 자신만의 승리 비법을 전파했다. 목표와 실적 관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자신은 승용차를 버리고 택시를 타고 다니며 기사들에게까지 노무현 알리기에 나섰다.

지난해 2월 열린우리당 의장 선거에서 정 후보를 지원했던 그는 지방선거 이후 정동영 대통령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노사모 초기부터 자신과 함께했던 23명을 모아놓고 “정동영은 포용과 통합이 가능한 지도자”라며 “그냥 끝내기엔 너무 아까운 상품”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 사람이 딱 10명씩만 지지자를 모아보자”고 말했다. 의류 브랜드를 회생시켰던 방식으로 정동영 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모인 200명이 정 후보 지지 모임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들)의 초기 멤버가 됐다. 이들과 함께 1박2일의 ‘정통사관학교’도 열었다. 7기까지 전국적으로 1800여 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정 후보도 매번 참석해 이들과 끈끈한 유대를 맺었다.

이씨가 참석자들을 정 후보의 열성 팬으로 만든 방식은 독특하다. 우선 일반 참석자들과 정 후보를 똑같이 대했다. 그는 “인원 점검을 할 때면 정 후보도 참석자들과 함께 ‘앉아 번호’를 했다”며 “마지막 행사인 서바이벌 게임에도 후보가 직접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참석 인원이 300명이든, 400명이든 후보가 전원의 말을 경청할 시간을 갖도록 했다. 보통 4시간 이상이 걸렸다.

한번 다녀간 사람은 대부분 정 후보의 열성 팬이 됐다. 그는 경선 과정에서 이들에게
‘무점포 판매’ 방식을 강조했다. “점포를 내고 지지율 3%짜리 정동영을 진열해 놓아봐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며 “직접 물건을 들고 뛰쳐나가 소비자들에게 우수성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며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경선 방식에 익숙해진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는 지난달 경선 시작 직전에 기자와 만나 “가을이 되면 운동회(경선)는 열리게 마련이고, 미리 연습·준비한 사람이 이기게 돼 있다”고 승리를 자신했다. “하루에 결론을 내는 한나라당 경선이 100m 달리기라면 지역별로 순차 경선을 치르는 신당 경선은 권투 시합”이라며 “1라운드에 대체적 승부가 갈리게 돼 있다”는 말도 했다.

실제로 이번 경선은 1라운드에서 승부가 갈렸다. 최종 2위를 차지한 손학규 후보는 제주·울산에서 이긴 정 후보의 대세론을 끝내 뒤집지 못했다. 이씨는 18일 “경선이 끝났으니 하는 얘기지만 울산의 경우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울산 경선 이틀 전 정 후보가 이곳에서 자신이 3위를 할 것 같다는 분석 보고를 받고 얼굴 표정이 굳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울산 경선을 앞두고 이 지역 선거인단 중에 지인(知人)이 있는 전국의 정 후보 지지자 600명이 자발적으로 투표 독려를 위해 울산에 집결했다”며 “여기서 승부가 났다”고 말했다. 정 후보는 울산에서 44%의 득표율로 1위를 했다.

최대 격전지는 친노의 본산인 부산·경남이었다. 이씨는 “특히 부산은 전직 장관, 청와대 출신, 당원협의회장 등 지역 정치권 인사 대부분이 이해찬 후보를 밀었다”며 “1년 가깝게 착실히 준비한 정 후보의 개미군단이 힘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정 후보는 부산에서 6689표를 얻어 6614표의 이해찬 후보를 75표 차로 힘겹게 이겼다. 이씨는 “부산·경남에서 이해찬 후보에게 한 표라도 질 경우 호남후보 본선 필패론을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당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선거운동에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대 후보 캠프에서는 그를 조직 동원의 주역이라고 공격했다. 부산에서는 지역 경선을 앞두고 정 후보 지지자들과 손 후보 측 의원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가 열성 지지자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차량 동원을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씨는 그러나 “국회의원 후보가 당내 경선을 위해 동원을 하려 해도 200명 모으기가 쉽지 않다”며 “이번 경선에서 투표한 사람이 44만 명이 넘는데 동원이란 말은 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차량 제공 부분에 대해서도 “요즘 차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라며 “자기가 하면 카풀이고 남이 하면 동원이냐”고 말했다. 그는 “상대 후보 쪽에는 선거 구도를 짜고 분석하는 사람들만 많았던 반면 정 후보 쪽에는 자발적 실천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요즘 본격적으로 본선을 준비하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그는 노사모의 노란 손수건과 돼지저금통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이번엔 정 후보 지지자들이 직접 유권자들의 요구를 듣고 와서 이를 정책·공약으로 만드는 방식을 구상 중이다. 정 후보가 주장한 ‘듣는 정치’를 구체화하는 데 열성 지지자들이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5년 전 노사모가 없었다면 노무현의 승리는 없었다. 신당 경선에서도 ‘정통들’의 선거운동 방식이 승리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열혈 지지자들을 앞세운 이 같은 방식이 이번 대선에서도 통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정 후보의 지지율은 아직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율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