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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을찾아서>홍성원 중단편집 투명한 얼굴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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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작가 洪盛原이 78년 『흔들리는 땅』이후 처음으로 중단편집 『투명한 얼굴들』(문학과 지성사刊)을 펴냈다.그동안 洪씨는 92년 怡山문학상을 수상한 『먼동』을 비롯,『달과 칼』『마지막 우상』등 꾸준히 장편소설을 발표해 왔지만 단편집을 낸 것은 16년만이다.
『투명한 얼굴들』은 78년부터 올해 4월까지 이미 발표된 13편의 작품을 묶고 있지만 각 작품에 흐르는 작가의 일관된 목소리로 마치 한권의 신작 장편처럼 읽혀진다.
『여기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한시대의 요구에 의해 현실에 뛰어들었다가 물러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그러나 그 물러남은 현실을 포기하고 등을 돌리는 도피와는 다릅니다.싸움의 현장에서 물러나도 현실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며 깨어있는 사람들 입니다.그들의 존재방식이 갖는 시대와의 보색대비를 통해 참여하는 사람들이지요.전망이 불확실한 시대에 지식인이 가져야 할 자세가 바로 이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洪씨가 단편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지속적인 관심은 개인이 어떻게 현실과 대응하는가라는존재방식에 대한 탐구로 요약된다.
그리고 洪씨의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존재방식은카뮈의 실존적 반항을 연상시킨다.
『산』의 주인공은 이사장의 멱살을 쥐는 바람에 퇴직당한 교장선생님으로 산장을 운영하며 혼자 산다.그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가난한 철학도와 결혼한 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이혼을 해야겠다고 했을 때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생각보다 마음이 아주 평안함을 느낀다.마치 오래전에 예상했던 일을 뒤늦게 딸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기분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사노라면 견딜 수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정년을 십년이나 앞두고 교장직을 버린 것도견딜 수 없는 일 때문이었다』고.
여기에서 그는 싸움의 현장인 학교에서 교장직을 버린 자신의 「선택」을 하나밖에 없는 딸로부터 이혼얘기를 듣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그는 딸이 견딜 수 없는 현실때문에 이혼이 여자에게 짐지워주는 불이익을 감내하며 「선택」을 하는 데 동조한다.이 순간 그는 딸을 자신과 동일한 싸움의 방식을 선택한 동지로 보기 때문에 평안함을 느낀다.
『해를 기다리는 갈매기』의 주인공은 파산한 40대 초반의 기업체 회장이고,『누항의 덫』의 주인공은 해임된 역사학과 교수이며,『일부와 전부』의 주인공은 운동권에 있다가 낚싯배를 빌려주며 생계를 꾸려가는 생활인이다.
이들은 표면적인 차이는 있을 망정 공통적으로 자의식에 대한 신념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응시하고 견디며 싸운다는 점에서 동일인이다. 이같은 싸움의 방식은 『투명한 얼굴들』에 실린 작품들의 기저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목소리다.이전 작품인 『폭군』『무사와 악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폭군』『무사와 악사』는 세속의 현장에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반면 『투명한 얼굴들』은 현장에서 밀려났거나 스스로 물러난 사람들을 주체로 내세운 점이다.
***파장전달 여부는 미지수 평론가 이남호는 이같은 변화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보다 자상하고 깊어졌다는 점에서 (싸움의)약화나 퇴보가 아니라 성숙이라고 해야 옳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의 삶의 치열함과는 별개로 洪씨의 싸움의방식이 가진 「내면을 향한 수축의 힘」이 얼마나 현실에 그 파장을 전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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