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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학교, ‘영남 최초의 여학교’로 개교 100주년…영욕의 한 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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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구시 수성1가의 신명여중 본관 모습. 27학급에 1000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대구시 동산동의 신명고 전경. 이 학교는 2004년 신명여고에서 남녀 공학으로 전환했다.


영남 최초의 여학교, 근대 여성 교육의 산실….

대구시 동산동의 옛 신명여고(현 신명고)는 늘 이런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고교 평준화 이전인 1970년대 후반까지 대구의 명문 여고로 ‘SM’이란 애칭을 얻었던 신명학원의 신명고가 23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같은 학교법인에서 갈라진 남산학원의 신명여중은 지난 15일이 개교 100주년이었다. 두 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학풍을 내세워 창의력과 지도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여성교육의 요람=“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190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마샤 스코트 브루엔(한국명 부마태) 여사는 12명의 학생 앞에서 이 같은 훈화를 했다. 장소는 남산(현재의 동산동)에 있던 선교사 사택 중 부인용 사랑채였다고 한다. 100년 전 신명여학교의 첫 입학식 모습이다. 당시 학교 설립 인가일은 15일, 개교일은 23일이었다고 한다.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191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가 브루엔 여사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으면서 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교가가 제정되고 본관과 기숙사도 건립됐다. 1912년에는 첫 졸업생 3명이 배출됐다.

신명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 문을 닫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믿음으로 학문의 횃불을 밝힌다는 뜻의 신명(信明)이란 교명을 문제삼아 일제가 1944년 4월 학교 문을 닫게 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다시 문을 열었지만 학교 이름을 남산여학교로 바꿔야 했다. 해방이 되고서야 ‘신명’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첫 여성 교육기관답게 항일운동에도 앞장섰다.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8일 당시 계성고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신명학원은 그래서 지난 3월 동산동 교정에서 ‘신명 3·8 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을 열기도 했다.

학교 교복을 두 차례 디자인한 패션 디자이너 박동준(56·55회)씨는 “바른 사람이 되라는 기독교식 가르침이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며 “신명여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신명여중 이희곤(55) 교감은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학교가 한 세기를 맞았다”며 “100년 뒤를 내다보며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말했다.

◆기념행사 풍성=신명고는 23일 ‘개교 100주년 기념역사관’ 개관식을 연다. 앞서 18일에는 한국패션센터에서 개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교복을 보여 주는 패션쇼를 연다. 패션쇼에는 권만수(89)씨 등 70, 80대 졸업생 4명 등 동문이 옛 교복을 입고 모델로 등장한다.

신명여중도 남산고와 함께 18일 용산동 학생문화센터에서 1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연다. 남산고 졸업생인 개그우먼 김효진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축하행사에는 국악과 성악, 관현악 합주, 재즈·댄스그룹의 노래와 춤이 펼쳐진다.

홍권삼 기자

신명여고가 배출한 인물들

신명여고는 해외 독립운동가였던 이금례(1회) 여사와 계명대 의대 교수를 지낸 사회사업가 신동학(35회),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변화경(52회), 패션 디자이너 박동준(55회)씨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부인 박영옥(35회)씨와 대구여성단체협의회장을 지낸 문정자(37회·대한어머니회 대구시연합회장)씨, 계명대 김복규(54회·행정학) 교수도 동문이다.
경제계에서는 주사제를 만드는 제일제약 김성자(36회) 회장과 대구상공회의소 여성기업특별위원장인 명진섬유 석정달(45회) 대표가 있다. 또 법조계에는 이명숙(68회)·황보영(69회) 변호사 등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걸프전 종군기자로 활약한 문화방송 이진숙(65회) 기자도 이곳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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