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그림 2700점 한사람이 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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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에서 가짜로 드러난 ‘물고기와 아이들’ 위작(左)과 이중섭 화백의 원작. [중앙포토]

검찰이 위작(僞作)으로 판정한 이중섭.박수근 화백 그림의 모조품 2800여 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부장검사 변찬우)는 그중 약 100점을 제외한 2700여 점이 같은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검찰의 감정 작업에 참여한 A씨는 17일 "누군가가 수십 년 전에 생산된 종이를 구한 뒤 그 위에 두 화백의 그림을 모방한 것이 틀림없다"며 "그림 대부분의 제작 방법이 비슷해 누군가 혼자서 대량으로 작업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 그림들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고서연구회 고문 김용수(69)씨가 직접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옛날에 생산된 종이는 서울 인사동이나 황학동에서 한 시간 안에 수백 장을 구할 수 있을 만큼 흔하며, 그림은 중학생의 미술 실력으로 조잡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나머지 100점은 누군가가 수십 년 전에 그린 그림을 구해 그 위에 두 화백의 서명만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50년 전 여중생이 그린 것으로 확인한 풍경화와 같은 경우다. 이 그림에는 박 화백의 서명이 있지만, 그림 뒤에 적힌 이름의 60대 여성은 검찰에 자신이 중학생 때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김씨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들은 대부분 종이가 빛바랜 모습이다. 김용수씨는 "그림에 사용된 종이가 생산된 지 수십 년 됐기 때문에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검찰은 종이에서도 위작의 증거를 찾아냈다. 종이 가장자리 4개 면의 퇴색 정도가 크게 다른 그림이 많다는 점이다.

감정단은 그림 위조자가 예전에 생산된 큰 종이를 최근에 잘라 사용했기 때문에 자르기 전 종이의 바깥쪽 부분이었던 곳만 퇴색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냈다. 종이는 통상 쌓아 두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가장자리부터 퇴색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A씨는 "그림이 정말 오래된 것이라면 퇴색이 고르게 된다"고 말했다.

박철준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는 "사건 관련자 처벌을 위한 마지막 보강 수사를 하고 있다"며 "이달 안에 수사를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미술계, "그럴 줄 알았다"=두 화백의 미공개작 2800여 점이 모두 위작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술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미술계에서 추정하는 이중섭의 작품 숫자는 1호 크기의 은박지화를 모두 포함해도 450점 안팎, 박수근의 작품은 500여 점 안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화백의 작품 2800여 점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목화랑의 임경식(전 화랑협회 회장) 대표는 "화랑가에서는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이들 작품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숫자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중섭의 작품은 미술관과 유명 컬렉터 손에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거래가 중단된 지 오래 됐다"며 "어쩌다 시장에 나오는 물건은 위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수근 작품도 어쩌다 외국인 소장자를 수소문해서 들여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물건이 없어서 거래 자체가 끊긴 지 오래됐다"고 전했다.

2005년 3월 이중섭 화백의 차남 이태성씨의 의뢰로 위작을 경매에 내놓았다가 환불과 대표이사 사퇴라는 곤욕을 치른 서울옥션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옥션의 한 관계자는 "사건 이후 작고 작가의 미공개작은 책이나 전시도록에 실렸다는 근거가 없는 한 경매에 올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현욱.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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