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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69.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하필이면 비가 오고 있었지만,토요일 오후를 놓치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다꾸라는 친구는 밤일을 나간다고 했으니까.3교시가 끝나고 전화를 했으니까 11시께였을 것이다.누군가 전화를 받길래 18호실이라고 하니까 또 벨이 울렸다.벨이서너번 울리고나서야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아 여보세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어쩌면 내가 깨운 건지도 몰랐다. -저 다꾸씨라는 분을 찾는데요.
다꾸에다 씨를 붙이니까 부르기가 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달리부를 수도 없었다.전화라는 게 참 묘해서 반말을 쓰기가 이상했다.그래서 나도 어른끼리 통화하는 것같이 굴었다.
-나 다꾼데…누구야.
수화기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졸린 목소리인 건 마찬가지였다.
-난 건영이 하고 같은 반인 달수라고 하는데요….
-아아…그래요,나도 이야기 들었어요.누굴 찾는다는….
다꾸라는 친구는 만리동의 여관에서 살고 있었다.서울역에서 마포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중간쯤에 있는 「천수장」이라는 여관이었다.18호실은 여관 건물 뒤쪽의 별채에 속해 있었는데,별채는 분위기로 봐서 장기투숙하는 사람들이 묵는 곳인 가 보았다.
18호실 앞의 뒤뜰에 서서 「18호실 계세요」라고 소리를 냈더니 누군가 러닝바람에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미닫이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달수…? 잠깐만 거기 어디 앉아서 좀 기다려주쇼.』 비가 오고 있었다.툇마루에 앉았는데도 비가 조금씩 들이치는 바람에 내 무릎께가 조금 젖고 있었다.나는 다른 악동들을 다 따돌리고비밀로 찾아온 거였다.왜냐하면 서로가 괜히 잘 맞지 않으면 싸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눈길로 야린다거 나 하면 금방 싸움이돼버릴 염려도 있었다.우리 또래의 사내들이란 하여간 위험한 거였다.한마디 말투나 눈빛 한순간 때문에 기죽기가 싫어서 전쟁을치를 수도 있는 게 우리들이었다.
잠시 후에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고 한 남자애가 그런대로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그 애는 손을 갈퀴처럼 해서 연신 긴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있었다.약간 우스웠던 건 그 애가 까만 장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비가 오고 있었고,그러니자기 얼굴을 가린다는 의미인 것같았으니까.어쨌든 서로 악수를 하고나서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건영이한테 대강은 들었는데… 여자 친구를 찾고 있다죠.』 나는 다시 한번 대강의 사정을 다꾸에게 설명했다.경찰에서도 찾고 있지만 효과가 없다는 것,가출일 리가 없고 자살할 이유도 없다는 것,따라서 인신매매 같은 걸 하는 놈들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 등등….
『그거 해먹고 사는 애들을 알긴 아는데…우리하고는 또 좀 다르거든요.나하고 아주 친한 것도 아니구 그래서…너희들 혹시 이런 거 하나 낚았냐라구 물어봐서는 소용이 없을 거라구요.아 하여간 사진은 가져 왔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이야 다들 새로 지어서 쓰니까 소용이 없구 사진이 있어야 돼요.성형수술도 시키구 그러지만…원래 아주 괜찮은 애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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