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세계 4대 '비보이 배틀' 잇따라 석권 … 한국은 왜 셀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LG전자가 '비보이(B-boy)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앞으로 5년 동안 1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본지 10월 8일자 e1면> 비보이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자사 제품의 이미지와 연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부도 비보이를 관광상품 차원에서 육성하고 있다.

한때 '날라리' 문화로 치부되던 비보이가 문화상품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비보이의 유래와 비보이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짚어본다.

◆비보이란?=브레이크 댄스(break dance)를 전문적으로 추는 남자를 뜻한다. 비(b)는 브레이크 댄스를 가리킨다. 요즘은 빠른 비트의 힙합 음악에 맞춰 추는 고난도 춤을 일컫는 말로 통한다.

비보이는 1970년대 미국 휴스턴과 뉴욕 브루클린의 흑인 밀집지역에서 시작됐다. 당시 뒷골목에서 패권 다툼을 벌이던 흑인과 히스패닉(미국에 밀입국한 중남미 국가 사람)이 춤을 출 때만큼은 싸우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춤 전쟁'이 벌어지게 됐다. 기를 죽이기 위해 상대 구역으로 몰려가 현란한 동작의 춤으로 시위를 하곤 했다. 비보이 대회를 지금도 '배틀(battle)'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한국 비보이는 세계 최강=세계 최고 권위의 비보이 대회인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 영국의 '유케이(UK) 비보이 챔피언십', 미국의 '프리스타일 세션', 국가를 옮겨가면서 개최하는 '레드불 비시원(BC ONE)' 등 세계 4대 비보이 배틀을 잇따라 석권하면서 한국의 비보이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게 됐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순식간에 비보이 붐이 생겨났다.

한국은 왜 비보이에 강할까. 무엇보다 집중적인 훈련과 강한 단결력.승부욕 등을 꼽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양인에 비해 짧은 하체가 무게중심을 잡는 데 유리하다는 점도 있다. 동영상을 통해 비보이 대회의 춤 동작을 분석하고 배울 수 있는 인터넷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독특한 전통문화와 사회환경을 거론하기도 한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요즘 대중문화의 코드는 폐쇄적인 공연장보다는 길거리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광장성'을 중시한다"며 "비보이 문화는 대중과 직접 교감하며 인기를 얻는다는 점에서 '마당놀이'에 견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입시와 공부 스트레스에 찌든 청소년들이 어른이 주도하는 지배문화에 염증을 느끼다 보니 하위문화, 즉 비보이에 매력을 느낀다는 주장도 있다. 지배 문화가 채워주지 못하는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는 비보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보이는 국가대표 히트 상품=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비보이를 '올해의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했다. 놀이를 베스트 셀러 상품으로 인정한 것은 상품성이 있는 비보이를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다. 광고에 미녀(beauty).아기(baby).동물(beast)을 등장시키는 '3B 마케팅'에 비보이를 추가, '4B 마케팅'을 가동하려는 것이다.

정부도 비보이 상품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전략상품개발팀 정진수 과장은 "비보이를 우리나라의 전략적 문화상품으로 키운다는 방침에 따라 해외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며 "해외 관광객의 여행상품으로 비보이를 적극 소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보이의 파생 상품도 쏟아지고 있다. 2005년 세계 최초로 국내에 비보이 전용 극장이 세워졌는가 하면 CF.TV 드라마.연극.영화 등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비보이 붐'을 보는 시각들=젊은 층이 비보이에 열광하는 것은 스포츠 못지않은 격렬한 동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리즈'(허공에서 일시 정지하기) '헤드스핀'(머리를 땅에 대고 돌기)처럼 중력을 거부하는 동작들을 인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행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비보이의 인기는 외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즐기는 젊은이들의 개방된 태도와 소수 매니어의 노력이 일군 합작품이기도 하다. 문화관광부의 '비보이 활성화를 위한 공청회'(2006년) 자료에 따르면 국내 비보이 인구는 3000여 명 정도다. 그럼에도 빠른 시간 안에 대중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열정적인 소수의 매니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보이의 상품화는 포스트모던(탈현대) 문화가 갖고 있는 특징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놀이가 상품이 되고, 취미가 직업이 되기도 하는 포스트모던적 속성과 비보이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소수의 놀이 문화였던 PC게임이 스타 게이머 등장 덕분에 문화상품으로 우뚝 선 것도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정부 또는 기업이 비보이를 상품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한국예술학) 교수는 "비보이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소수의 비주류가 즐기는 문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와 기업의 개입으로 비보이 문화가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소수가 즐기던 영국의 '펑크 문화'를 패션업계가 상업적으로 활용하면서 변질된 뒤 퇴락했다"며 "비보이를 문화현상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만 접근하면 대중이 외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보이 1세대'로 불리는 이우성 익스프레션 팀 단장도 "요즘은 춤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돈과 인기만 좇는 비보이도 많다"고 지적했다.

장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