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TV 뒤집기] ‘싸대기’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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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이번 주 내 눈을 번쩍 뜨게 한 건 KBS2 ‘상상플러스’의 사소한 순간이었다. 불행하게도 좋은 의미에서는 아니다. 1970년대의 톱가수 남진이 후배 신정환과 탁재훈의 뺨을 찰싹찰싹 때려대는 그 짧고 사소한 순간, 확 역겨움이 밀려들었다. 평소 후배들을 사랑하기로 이름난 이 선배의 애정표현법은 ‘싸대기 바르기’란다. 그래서 마흔이 다 된 귀여운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싸대기’를 선물했다. 신정환과 탁재훈은 몇 달 전 ‘해피 선데이’에서도 남진에게 이 선물을 받았고, 그때를 기억하며 웃는 얼굴로 선배님께 얼굴을 바쳤다. 웃자고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해피 선데이’ 때는 그냥 나이 든 선배의 ‘오버’로 인한 실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가 보다. 제작진은 그게 정말 재미있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니 이 불쾌한 유머를 리바이벌한 것 아니겠나.

모난 성격 때문에 부모님에게 되게 맞았고, 여고생 때는 담임에게 뺨을 맞았고, ‘군기’를 강조하던 직장에서도 성질 부리다가 남자 선배한테 귀싸대기를 바쳐야 했던 개인적인 경험을 평생 머리에서 지우지 못하는 나에게는 폭력에 대한 결벽증적인 거부감이 있다. 폭력은 그것이 귀여운 것이든, 애정 어린 것이든, 절대 유쾌한 것이 못 되며 때리는 걸로 가르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게 맞아본 사람으로서 내 입장이다. 나는 아이를 매질하는 부모가 싫고, 학생 엉덩이를 멍들게 하는 선생님은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식을 위해 복수의 주먹을 휘두른 회장님의 마초적 행위와 흐지부지된 법적 처벌에 ‘꼭지가 돌았으며’, 나아가 이 모든 사회의 폭력이 용인되도록 만든 군대문화를 증오한다.

연예산업의 선두주자 할리우드나 각종 문화예술의 선진국을 봐도 ‘선후배 간의 단단한 기강’이 성공의 근원이라는 논문 하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엔터테인먼트나 문화계 쪽에서 더 ‘군기’를 강조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 무용과 학생들이 선후배 간의 ‘얼차려’로 종종 뉴스에 오르내리고, 개그맨 선후배 간에도 폭력적인 가르침 때문에 얼마 전에 문제가 됐었다. 유달리 선후배 간의 관계와 서열을 따지는 개그맨 문화는 TV 화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그걸 자랑이라는 듯 내세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의 따끔한 가르침보다는 개인의 창의성이 더 중요해 보이는 그 분야에서 바짝 든 ‘군기’는 결국 비뚤어진 문화를 낳게 마련이다. 능력보다는 서열부터 따지고, “감히 선배한테” 하면서 후배 윽박지르고, “누구누구 라인이네” 하며 인맥·학맥·기수로 줄 세우는 것들이 다 이런 군대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남진에게 뺨을 맞은 ‘상상플러스’의 ‘선배’들 역시 같이 출연하는 후배들을 막 대하며 선배의 위세를 과시하지 않나.

후배들의 뺨을 애정 때문에 때린다는 남진이 그 쇼에서 수십 년 전 허벅지에 칼을 맞은 ‘폭력’의 피해자였음을 말할 때 참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졌다. 폭력은 사소한 데서 일상화되어 거대한 폭력을 불러오는 것이다. 후배들을 향한 진정한 애정은 뺨을 어루만져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후배가 느낄지 모르는 수치심을 배려해 그를 때리지 않는 것이다. 제발, 결코 유쾌하지 않으니 TV에서는 사람 때리면서 웃으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문화통으로 문화를 꼭 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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