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HSBC '이면합의'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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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BC가 외환은행 대주주인 론스타와 외환은행 인수 계약을 맺으면서 ‘1조원 이상을 대출해준다’는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론스타와 HSBC의 외환은행 매각 계약과 관련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으나 별도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외환은행 재 매각 계약에 깊숙이 관여한 고위 관계자는 “외환은행 인수를 조건으로 (HSBC가) 1조원 이상을 시장 금리보다 낮게 대출해 주기로 하는 이면합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두 당사자 간 (인수와 대출) 조건부 계약은 양자의 이해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론스타는 자금을 회수하려는 투자자들로부터 자금 회수 압박에 시달렸고, HSBC는 외환은행 인수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출을 조건으로 인수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론스타는 대출금을 받아 투자자에게 돌려 줄 수 있고, HSBC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 시장에서 강력한 영업망을 확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지난 9월3일 론스타는 외환은행 지분 51.02%를 HSBC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론스타가 확인해서 공개된 인수 금액은 63억1700만 달러. 여기다 내년 1월 말 시한을 넘길 경우 1억3300만 달러를 추가로 지급하기로 했다.

이 가격은 계약을 전후한 시점의 환율과 외환은행 주가를 고려할 경우,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30%의 프리미엄이 붙은 액수다. 국내에서 영업력을 확대해야 하는 HSBC의 강력한 외환은행 인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의 반발이 예견됐음에도 HSBC와 왜 계약을 강행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비리 의혹과 외환카드 주가 조작 사건 등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매각을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론스타는 6월 초 계약 직전 단계에서 싱가포르 개발은행(DBS)과의 협상을 중단해야 했다.

투자자들, 론스타 압박

금융 감독 당국의 입장에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론스타가 두 달 여 만에 계약을 추진한 이유는 뭘까?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유력했다. 우선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거래를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물론, 자산 규모 세계 3위인 HSBC의 위세도 활용하려 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와 함께 내년 4월까지 금융 감독 당국의 승인이 나지 않아 계약이 결렬되더라도, 론스타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이다. HSBC와 계약에서 외환은행 매각 가격을 높게 책정함으로써 향후 새로운 매각 협상의 가이드 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론스타와 HSBC의 계약과 관련,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1조원 대출 이면합의’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론스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론스타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 상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계약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모펀드의 특성상 론스타는 일정한 기한 내에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원리금을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외환은행에 대한 투자금이 3년 이상 묶이면서 일부 투자자들은 론스타에 원리금 반환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6월 중순 미국에서 열린 주주총회 때도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은 한국에서의 자금 회수 계획을 묻는 투자자들의 집중적인 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 DBS와 계약이 결렬되자마자, 론스타가 외환은행 지분 13.6%를 블록세일 형태로 증시에서 매각한 것 역시 이런 투자자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분석이다.

론스타는 국제 투자 자본 중에서도 자기자본 보다는 외부 자금을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도 론스타의 자기자본은 1700억 원 밖에 유입되지 않았다. 이는 전체 외환은행 인수자금 1조3300억 원 가운데 10%가 조금 넘는 액수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할 당시 금융감독원은 론스타가 1조750억 원의 신규 자금을 외환은행에 투입해 재무 건전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으나 자체 자금은 턱없이 적었던 것이다. 론스타가 외환은행 인수가액의 90% 가까운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인수 당시 금융감독원 공시자료에 따르면, 론스타는 10년 만기 연 6%의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그러나 최근 이 공시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은 당시 론스타에 3900억 원을 댄 네덜란드계 은행인 ABN-암로의 회계 자료를 통해, 론스타가 채권 형태로 자금을 조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그 근거로 암로 측이 외환은행 주가 변동을 손익에 반영한 점을 꼽았다. 고정수익(fixed incom)으로 분류되는 채권의 경우 일정한 이자 수익만 발생할 뿐 주가 변화가 투자 손익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6월 말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은행을 인수할 계획이 없었던 HSBC가 갑자기 입장을 선회한 이유도 논란거리다. 6월 하순 스티브 그린 HSBC 금융그룹 회장은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금은 한국의 은행을 인수할 계획이 없고, 한국에서는 자생적 성장을 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론스타와 계약 직전까지만 해도 업계에서는 HSBC가 외환은행을 독자 인수할 것이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론스타와 HSBC가 전격적으로 계약을 맺게 된 데에 속사정이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론스타는 HSBC와 계약으로 자금난이 해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론스타는 9월 중 일본 도쿄에서 외환은행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으나, HSBC와의 계약 이후 이를 유보한 것으로 안다”고 확인했다.

외환은행 재매각 계약을 둘러싼 론스타와 HSBC 간의 비공개 이면 합의와 관련해, HSBC 서울지사 측은 ‘자신들로서는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또 론스타 코리아 관계자도 “우리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 확인할 수 없다”고만 말했다.

이여영 기자


론스타-DBS 계약파기 전말

[단독취재] "외환銀 인수 조건으로 1조원 대출" #시장 금리보다 낮게 책정…두 회사 관계자 “우리는 모르는 일”

금감위, 공격적 영미계에 허 찔렸다

지난 6월5일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의 부회장 겸 CEO인 잭슨 타이(載國良·56)는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한국으로 날아온 그는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론스타 측으로부터 이날까지 외환은행 인수 계약 체결 여부를 알려달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작은 키에 신중한 인상의 그는 한화로 7조 원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금감위의 의사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해 금감위 실무자들은 DBS의 대주주 적격성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DBS는 국민은행과 경합을 벌였던 외환은행 인수전을 한때 포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론스타는 국민은행과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 후 줄곧 외환은행을 인수할 의향이 있는 5~6개 금융기관과 비공개 재매각 협상을 벌여왔다. 그 가운데서도 DBS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실제로 론스타 측은 이들과 연초에 매각 가격과 조건에 잠정 합의한 후 양해 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각서 내용은 DBS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지분 중 51% 이상을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하고, 나머지를 국내외 컨소시엄에 넘기는 방안이었다.
당시 DBS가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로 떠올랐던 것은 외환은행 임직원들이 새 주인으로 가장 반겼기 때문이다. 외환은행 노동조합(위원장 김지성)은 지난해 국민은행과 경합할 당시나 최근의 재매각 협상 과정에서 한결같이 DBS를 지지해왔다. DBS가 유독 외환은행의 독자 생존과 직원의 고용 보장, 장기 발전계획 제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DBS는 론스타와 별도로 외환은행 직원 대표들과도 비공개 협상을 벌여왔다.

론스타도 직원들의 지지를 얻는 DBS를 선호했다. 추후 비공개 매각 협상이 불러일으킬 논란을 감안하면 직원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더욱이 DBS는 사모펀드인 론스타와 다른 금융자본이었고, 이들의 자본이 들어오게 되면 론스타가 우리나라에서 돈만 벌고 튄다는 이른바 ‘먹튀’ 논란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5개월 넘게 끌어온 론스타와 DBS 간의 비공개 협상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 논란을 둘러싼 법정 공방이다. 금감위는 법원의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는 외환은행의 재 매각을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 매각 협상을 서둘러온 론스타는 법원 판결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DBS도 재 매각과 법원 판결을 분리하자는 론스타의 주장에 동의했다.

남은 문제는 금감위의 승인이다. 금감위 실무자들이 DBS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린 것은 싱가포르의 국영 투자기관인 테마섹이 사실상 이 은행을 지배하고 있고, 금융 주력 사업자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DBS는 DBS와 테마섹의 겸직 이사를 해촉하고, 싱가포르 금융감독 당국인 MAS의 의견도 승인 신청서에 첨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난 6월 5일 국내에 체류 중이던 잭슨 타이 부회장은 금감위 승인을 확신을 하지 못했다. 외환은행 향방을 자신 있게 말해 줄 금감위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론스타는 계속해서 승인 신청에 따른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계약을 체결하자고 재촉했다.
시간을 더 달라는 DBS의 요청에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은 결국 협상 중단을 공식화했다. 잭슨 타이의 방한 3일 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DBS와 협상은 중단됐지만 다른 인수 후보들은 건재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후 3개월 만에 론스타는 영국계인 HSBC와 외환은행 재 매각 계약을 성사시켰다. 금감위는 론스타와 HSBC간의 계약 가능성을 사전에 포착했지만, 실사(due diligence) 등 계약 전의 기술적 절차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단했다. 화교계 자본과 달리 과감하고 공격적인 영미계 자본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허를 찔린 셈이다.


외환은행 직원들의 고민

간판 지켜줄 ‘주인’은 없나

금융계에서 외환은행 직원들은 ‘비운의 해외 입양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3년 론스타에 팔린 이 은행의 처지 때문이다. 론스타가 HSBC와 계약을 체결하자, 외환은행 직원들의 고민은 더 깊어가고 있다.

HSBC측은 직원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있다. 외환은행의 독자 생존을 포함해 직원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반면 직원들은 이를 반신반의하고 있다. 세계 4위의 은행이 유독 외환은행 이름만 유지할 리 없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대놓고 HSBC의 입성을 반대하기도 난처한 입장이다. DBS에 이어 HSBC까지 물 건너가게 되면, 국민은행이나 하나은행 같은 국내 은행이 인수 후보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직원들로서는 이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여긴다. 외환은행이 형체도 없이 흡수합병 될 것이 뻔해서다.

지난해 국민은행이 우선 협상대상자가 됐을 때 이들이 결사 반대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외환은행 노동조합(위원장 김지성)은 론스타와 HSBC의 계약 이후 공식 입장을 밝히기를 꺼려 왔다. 반면 중간 간부 모임인 부점장비상대책위원회는 HSBC와의 계약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외환은행 직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외환은행이라는 간판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제는 매각 작업의 열쇠를 최대 주주인 론스타가 쥐고 있다는 점이다. 금감위는 론스타가 결정한 인수 후보가 외환은행의 대주주로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간도 직원들 편이 아니다. 금감위는 공개적으로 론스타 관련 법정 다툼의 최종 결과가 나와야 재 매각을 승인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최장 2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 그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외환은행이 현재의 경쟁력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이래저래 외환은행 직원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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