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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C의 치명적인 유혹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호 29면

맛있는 와인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얼마든지’라는 생각은 술로 인해 대뇌가 둔해져서 생기는 일시적인 착각이다. 만취한 뇌의 명령에 따라 계속 마시다 보면 이튿날 숙취로 맥을 못 추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 남매도 여러 차례(정신을 못 차리고) 그런 경험을 했다.

지난 몇 년을 통틀어 가장 끔찍해서 잊히지도 않는 그 기억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와인 저널리스트 무슈 스도가 개최하는 와인 모임에 참석한 때였다. 무슈의 와인 모임은 항상 경매에서나 구할 수 있는 희귀 와인을 중심으로 해서 열리는데, 이때 테마는 놀랍게도 ‘DRC 특집’, 즉 ‘DRC(도메인 로마네 콩티)’의 7개 특급 와인을 전부 마신다는 초호화 기획이었다.

이 연재물을 읽어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DRC’는 우리 남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생산자다. 참가비는 12만 엔으로 고액이었지만, 당분간 와인 구입을 중단하면 해결될 터. 1년 전에 이 와인 모임을 기획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바로 참가 결정을 내렸다. ‘DRC’를 편애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지, 이 모임은 알림과 동시에 바로 정원이 찼다고 한다.

모임 당일 ‘골수 와인 마니아’가 한자리에 모인 ‘DRC’ 특집 와인 모임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이번에는 특별기획이기 때문에 늘 하는 블라인드 승부도 없습니다. ‘DRC’ 특급 와인의 복잡하고 화려한 매력에 흠뻑 빠져보세요”라는 무슈의 개회 선언에 회원들은 “오오!” 하고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돌이켜 보면, 약간의 긴장을 필요로 하는 블라인드 승부가 있었다면 그 정도까지 취하진 않았을지 모른다. ‘에세조’와 ‘그랑 에세조’를 마시는 동안 느슨해진 대뇌가 “‘DRC’ 수준의 와인이라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을 거야”라고 엉뚱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

더 큰 불행은(그때는 횡재했다고 생각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전 일이 있어서 그만 실례하겠어요”라며 도중에 자리를 뜬 것이다. 이 여성은 와인을 마신다기보다 맛을 확인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학구형(學究型)으로, 글라스 안에는 아름다운 ‘DRC’ 와인이 남실남실 차 있었다. 그게 탐이 나 눈독 들이고 있는 나에게 무슈는 “아까운데 마시지 그래요?”라고 말했다. 판단력을 잃은 뇌는 이 한마디에 냉큼 달려들었다. 나는 마침내 옆사람이 남긴 와인잔을 깨끗이 비워버렸고, 애통하게도 이벤트의 ‘백미’인 ‘로마네 콩티’를 마시기도 전에 잔뜩 취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다음 날은 종일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두통과 위가 튕겨나갈 것 같은 구토 증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숙취는 와인애호가라면 한번쯤 치르게 되는 괴로운 경험이지만, 맛있는 와인과 술에 취해 둔해진 대뇌가 보내는 ‘거짓 신호’는 모쪼록 조심할 것을 권하고 싶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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