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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바닥 치고 일어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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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바닥을 치면 일어서는 것은 비단 주식시세만이 아니다. 삶도 마찬가지다. 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며 영어를 가르치는 독특한 강의법으로 잘 알려진 문단열씨는 외환위기 직전이었던 1996년 당시 신촌에서 등록학생 수만 1500명에 육박하는 학원의 잘나가는 강사 겸 원장이었다. 하지만 알량한 성공으로 겸손을 잃었던 그는 외환위기 때 학원이 망하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의 노숙자를 보며 그들과 자신의 차이는 주머니 속에 달랑 한 장 있던 목욕티켓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보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어를 못해 낙담하고 낙오했던 사람들의 아픈 마음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어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궁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 덕분에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서울역 앞을 지나다 보면 아직도 적잖은 노숙자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바닥 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들은 바닥을 친 것이 아니라 어제에 대한 미련과 회한의 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자기 인생의 허공에서 스스로를 용서도 용납도 못한 채 천형처럼 떠돌고 있는 사람들이다. 진짜 바닥을 쳤다면 거기 그러고 있지 않을 것이다. 길 가는 사람에게 500원, 1000원씩 구걸하다 못해 갈취해 결국엔 밥 대신 ‘소주를 까며’ 자기 인생의 속살을 안주 삼진 않으리라. 만약 바닥을 쳤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얼굴 씻고 머리 자른 후 수염 깎고 공사판 잡일이든 청소일이든 찬밥 더운밥 안 가리고 두 손 걷어붙이며 나설 것이다. 진짜로 바닥을 치면 튕겨서라도 다시 일어서듯 되레 강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노숙자는 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문드러진 ‘마음의 노숙자’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고뇌와 자학의 피고름이 범벅 된 채 스스로를 미련과 회한과 자책의 감옥에 가두다 못해 어느 순간 충동적으로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며 막다른 골목으로 자신을 내몰기 일쑤다.

올 2월 창원지법의 한 법정에는 서른한 살 난 젊은 피고인이 서 있었다. 그는 카드 빚 3000만원을 갚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려고 투숙한 여관방에 불을 질렀다 붙잡혀 방화미수죄로 법정에 섰다. 재판장은 선고에 앞서 피고인에게 ‘자살’이란 말을 열 번만 되뇌어 보라는 뜻밖의 주문을 했다. 머뭇거리던 피고인은 재판장이 재차 지시하자 ‘자살’을 열 번 되뇌었다. “자살, 자살, 자살…살자, 살자, 살자.” 재판장은 피고인이 반복해 말한 ‘자살’이 결국엔 ‘살자’로 들린 것처럼, 때로는 죽을 이유가 살 이유가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바닥을 치고 나면 죽을 이유도 살 이유가 된다.

올해 노벨의학상 공동 수상자인 미국 유타대의 마리오 카페키 교수는 2차대전 와중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수용소에 갇혀 졸지에 거리의 부랑아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삶의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카페키는 ‘생존에의 사투’를 벌이며 자신을 끈기와 집요함의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시켰다. 그것이 삶의 밑거름이 되어 그는 미 국립보건원(NIH)마저 “성공할 가능성이 작고 계속할 가치도 없다”며 외면했던 ‘유전자 적중(gene targeting)’ 프로젝트를 집요하게 밀고 나가 마침내 의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고 했다. 누구나 쓰러지고 넘어진다. 때론 추락한다. 하지만 넘어진 곳에 주저앉지 않고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다시 열린다. 추락한 곳에서 몸을 일으켜 애써 날갯짓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날마다 재창조된다. 그러니 바닥치고 일어서라!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