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연장 순례] 4. 베를린 필하모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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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15일 저녁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베를린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연주를 들었다. 이날 오전 독일 국가 연주와 함께 개관 테이프를 끊은 베를린 필하모니 개관 공연이었다. 브란트 총리 옆자리엔 이 콘서트홀을 설계한 한스 샤룬(1893~1972)부부가 앉아 있었다.

1882년 창단된 베를린필은 롤러스케이트장을 개조한 옛 필하모니 건물이 44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뒤 교회당.영화관.학교 강당을 전전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베를린필의 친구들'을 결성해 필하모니 신축을 위한 모금에 나섰다. '필하모니 복권'에 이어 액면 가격에 5페니의 기금을 보탠 10페니, 30페니짜리 우표도 발행됐다.

무대를 건물 중앙에 배치하고 객석을 16개의 블록으로 샤룬의 설계안은 '구두 상자'모양의 장방형(長方形) 콘서트홀에 익숙해 있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설계안이 당선 직후 반대 여론에 부닥친 것도 이 때문이다. 카라얀은 샤룬의 설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베를린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결코 적지 않은 객석수(2천2백40석)지만 무대와 객석의 최대 거리는 30m에 불과하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텐트형 지붕과 외관은 실용적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공연장 설계는 안(무대와 객석)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각.청각.공간 등 모든 면에서 음악을 중심에 배치한 건물이다.

'카라얀 서커스'란 애칭으로 불렸던 필하모니는 고대의 원형 무대를 재현한 것 같은 객석 배치로 온통 축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주자와 청중, 청중과 청중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체험한다. V자형 콘크리트 기둥이 객석을 떠받치면서 발코니를 이루고 있는 로비도 이채롭다. 처음 방문한 관객이라도 알파벳 글씨만 따라 계단을 오르면 금방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첫선을 보인 포도밭 스타일의 객석 배치는 덴버 콘서트홀, 카디프 데이비스 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토론토 로이 톰슨 홀, 도쿄 산토리홀, LA 디즈니홀, 로마 파르코 델라 무지카의 모델이 되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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