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연장 순례]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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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람블라 거리는 하루종일 활기가 넘친다. 가로수 아래 노천 카페와 꽃가게, 거리의 악사, 판토마임 배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그 거리를 가득 메운다. 람블라 거리의 중심은 리세우 극장이다. 카탈루냐 지방의 문화적 자존심과 같은 존재다.

리세우는 유난히 사고가 많았던 극장으로도 유명하다. 1847년 개관 이후 두 차례나 화마에 휩싸였다. 1861년 화재 때는 로비와 계단만 남겨 놓고 전소됐다.

바르셀로나의 중심 대로변에 위치하다 보니 오페라 극장이라고 해서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1868년 혁명이 발발하자 성난 군중들은 극장 안으로 들어와 중앙 계단에 있던 이사벨라 2세 여왕의 대리석 흉상을 끌어내 람브라스 거리에 내동댕이친 다음 바다로 끌고가 빠뜨려버렸다. 1893년 11월 7일 그해 시즌 개막 공연에서는 로시니의‘빌헬름 텔’ 2막에서 3중창이 막 시작될 무렵 5층 발코니 석에서 한 무정부주의자가 폭탄 두 개를 1층 바닥으로 던졌다. 그중 한 개가 터져 20명이 사망하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나머지 한 개가 터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 사고로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적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시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극장은 복구 공사를 거쳐 1894년 1월 18일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폭탄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이 있던 자리에는 몇 해 동안 아무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폭탄 테러와 화재가 끊이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때 스페인이 중립을 선언한 덕분에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은 섬유 산업으로 군수 물자를 대면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덕분에 1920년대 리세우 극장은 유럽 굴지의 오페라극장으로 발돋움했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도 전쟁을 피해 바르셀로나에 와서 보금자리를 마련할 정도였다.

하지만 1931년 제2공화정으로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면서 리세우는 재정 적자로 허덕였다. 바르셀로나 시의회와 카탈루냐 지방 정부의 재정 지원 없이는 금방이라도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리세우는 국립 극장이 되면서 ‘리세우 극장-카탈루냐 국립 극장(Teatre del Liceu―Teatre Nacional de Catalunya)’이라는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내전이 끝난 후 1939년이 되어서야 극장은 원래의 소유주인 상업 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 총통이 사망하자 람블라스 거리는 사회 정의를 외치는 시위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리세우’를 독재 정권의 반동 파시스트 분자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페라 극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시위대가 폭력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7년 스페인 민주화와 함께 관객 수도 줄어들었다. 늘어나는 제작비를 쫓아가지 못해 공연의 질은 점점 떨어졌다. 오페라 공연 이외의 이벤트를 유치해도 별 도움이 안되었다.

1980년 극장의 미래를 염려한 나머지 카탈루냐 총독, 바르셀로나 시의회, 리세우 극장 이사회는 공동으로 리세우 극장 컨소시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바르셀로나 지방 정부는 1985년, 스페인 문화부는 1986년에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바르셀로나에 오페라가 처음 소개된 것은 스페인 왕이 계승 전쟁에 참가한 오스트리아 카를로스 대공 덕분이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그를 위해 바르셀로나에 작은 궁정을 지어놓고 1708년 8월 2일 안토니오 칼다라의 오페라 ‘Il piu bell nome’를 초연했다. 카를로스 대공과 브룬스비크 공주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선물이었다. 스페인 북동부 에브로 강을 배경으로 한 전설을 오페라화한 작품이다. 칼다라는 헨델과 동시대에 활동한 이탈리아 작곡가다.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에서 상연된 최초의 오페라다.

‘리세우’라는 말은 1837년 마누엘 기베르트 이 산스가 이끄는 포병 부대가 만든‘Liceo Filodramatico de Montesion’에서 기원한 것이다. 필립 5세 휘하의 군인들은 이 곳에 주둔한 사병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여흥의 하나로 오페라를 장려했다.

리세우 극장은 1847년 4월 4일 교향곡, 연극, 발레, 칸타타 등 다채로운 갈라 콘서트로 문을 열었다. 객석수는 4000석.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오페라 극장이었다. 첫 오페라는 이튿날 상연된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였다. 초창기엔 오페라뿐만 아니라 발레, 콘서트, 연극, 마술교, 버라이어티 쇼도 무대에 올랐다. 처음엔 공연 당일에 극장 로비에서 소규모 주식 시장이 열렸다. 1층 객석 의자 위를 널판지로 덮은 다음 화려한 가면 무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입석이다 보니 6000명까지 수용했다.

리세우 극장이 자리잡은 람블라 거리의 짜투리 땅은 원래 트리니타리스 수도원 자리였다. 무역업으로 돈을 번 부르주아들이 주식을 사서 건립한 오페라하우스여서 로열 박스가 따로 없다. 콘도미니엄 분양하듯 상업 귀족들에게 박스석을 분양해 건축비를 마련했다. 1981년까지만 해도 이 극장의 법적 소유주는 박스석의 소유자들인 상업 귀족들의 후손들이었다. 바르셀로나 지방 정부에서 예술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극장은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지방 부르주아들이 자신들만의 극장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

상업 귀족을 위해 박스석 분양

오페라 극장에는 언제나 다양한 사회 계층이 공존한다. 가장 좋은 자리는 박스석이다. 발코니석은 높이 올라갈 수록 음악 애호가 클럽, 기술직 종사자, 소시민으로 낮아진다. 맨꼭대기층은 노동자 계급의 몫이다.

리세우 극장은 1994년 1월 31일 발생한 화재로 건물의 외벽과 사교 클럽만 남겨두고 몽땅 잿더미가 돼버렸다. 그날의 화재는 어쩌면 불행의 탈을 쓰고 나타난 축복이었을 지도 모른다. 운명의 아침이 밝아오기 전 이미 극장 확장 공사 계획은 진행 중이었지만 지지부진했다. 화재는 새 건물을 증축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대적인 복원과 개ㆍ보수 공사를 거쳐 1999년에 문을 열었다.

비좁은 도심의 짜투리 땅을 벗어나 널찍한 교외에 오페라극장을 현대식 설계로 새로 짓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옛날 그 자리에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유럽인들은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는 데 매우 보수적이다. 대신 헐어낸 인근 건물 자리에 교육센터, 뮤지엄 숍 등 현대식 시설을 갖췄다. 건축 면적은 3배로 늘어났다. 극장 내부에도 첨단설비를 마련했다. 복원 과정에서 지하에 대규모 로비가 추가됐다. 막간에 휴식과 음료를 즐기는 것은 기본이고 심야 리사이틀, 어린이를 위한 인형극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발코니석, 천장, 무대 위 곳곳에 라이브 DVD 레코딩이 가능하도록 20여개의 무인 카메라를 붙박이로 설치했다. 중앙 통제실의 명령에 따라 상하 좌우로 움직이면서 무대와 객석의 표정을 리얼 타임으로 잡아낸다. 굳이 관객의 시야를 방해하면서까지 TV 중계용 카메라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 공연이 끝난 후 DVD 테이프를 넘겨주면 그만이다. 리세우는 자체 DVD 제작 시스템으로 케이블 TV 등에 중계권을 판매하면서 적잖은 수입을 벌어들인다. 객석에는 개인용 액정 자막이 설치돼 있다. 206개의 ‘음악 애호가석’(시야 장애석)에서는 무인 카메라의 생중계로 무대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모든 공연 DVD로 자체 제작하는 첨단 시설 갖춰

극장에 들어갈 때는 바 코드가 찍힌 티켓을 로비 입구에 설치된 전자 감식기에 통과시켜야 한다. 도둑이나 불량배, 방화범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다. 예매할 때는 이름을 꼭 물어본다. 매표소 단말기에서 리얼 타임으로 입장객을 확인할 수 있어서 티켓을 잊어버리고 안 가져와도 신분증 확인 후 재발급해준다. 한 번은 외출했다가 바로 극장으로 향했는데 티켓을 호텔에 놔두고 나오지 않았겠는가. 호텔로 다시 돌아가서 티켓을 가져오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티켓 예매 때 이름을 물어본 기억이 나서 매표소를 찾았다. 창구 직원은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더니 내 자리에 해당하는 티켓을 들고 입장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단말기로 확인한 후 티켓을 재발급해 주었다.

첨단 설비로 재개관한 다음 리세우 극장의 시즌 티켓 판매는 화재 발생 직전 7000장에서 1만 8000장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낱장 티켓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라 트라비아타’‘카르멘’ 등 스탠더드 레퍼토리의 티켓은 공연 당일 입석도 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견습 가수(understudy)가 출연하는 할인 공연을 마련하기도 한다.

◆공식명칭: Gran Teatre del Liceu

◆홈페이지: www.liceubarcelona.com

◆개관: 1847년 4월 4일(재개관 1999년 10월 7일)

◆건축가: 미후엘 가리가 이 로카, 조셉 오리올 메스트레스, Miquel Garriga i Roca and Josep Oriol Mestres(1847년), 이그나치오 솔라 모랄레스(1997)

◆객석수: 2,292석(입석 400석 별도)

◆초연: 파야‘아틀란티다’(1961년 콘서트 형식)

◆부대 시설: 지하 로비(325∼460석), Cercle del Liceu(Ramon Casas의 회화 컬렉션), 거
울의 살롱, 매점과 카페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8시30분까지)

◆기타: 프란시스코 비냐스 국제 성악 콩쿠르 장소

◆극장 투어: 가이드 투어 5.5 유로(단체 4.5 유로), 개인 방문 3.5 유로 +34-93-485-9914

◆주소: La Rambia 51-59, 08002 Barcelona, Spain

◆전화: +34-93-485-9900(안내) +34-93-485-9913(매표소). +34-93-485-9918(팩스) +34-902-33-2211(전화 예매)

◆교통: 지하철 Liceu역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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