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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역사 칼럼] 사랑도 질투도 여자의 생존전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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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27면

16세기 중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쓴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부인 김씨는 질투가 유난했다. 1552년(명종 7) 겨울, 이문건이 경북 성주에서 귀양살이할 때의 일이다. 조선시대 귀양살이는 관직에서 쫓겨나 특정 지역에 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일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 관직자와의 교류가 긴밀하고, 그 때문에 연회에도 종종 참여한다. 지역 수령 등은 서울에서 벼슬하다 유배 온 사람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이 언제 다시 서울로 복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유배생활 중 부인 김씨는 관기(官妓) 종대(終代)와 이문건 사이를 의심해서 집요하게 추궁하곤 했다
는 기록이 나온다.

‘부인이 밤새 해인사 숙소에서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자세히 물었다. 기생이 방에 있었다고 말하자 부인이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아침이 되자 베개와 이불 등을 모아 칼로 찢고 불에 태웠다. 그리고 두 끼를 먹지 않고 종일 질투하며 꾸짖으니 염증이 난다.’

과거시험 동기 모임에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온 이문건은 그야말로 봉변을 당했다. 베개와 이불을 찢고 불에 태웠다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집 부인의 행동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이문건 본인이 직접 쓴 일기 내용이니 사실일 것이다.

부인이 이렇게 질투를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문건과 종대는 좀 친밀했던 모양이다. 연회가 있을 때 서로 옆에 앉고 앉히고 싶어 하는 사이였다. 부인이 이를 눈치 챈 것이다. ‘해인사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 이문건이 또 외박을 했다. 부인은 “멀지도 않은 곳인데, 어찌 밤에 돌아오지 않고 기생을 끼고는 남의 집을 빌려 잘 수 있습니까? ”라며 또 호되게 남편을 꾸짖었다. 부인의 투기(妬忌)가 하도 심해서 심성이 무던한 이문건도 대답이 부드럽게 나올 수 없었다고 했다. 밤이 돼서야 부부 사이의 화가 조금 풀어져 겨우 요기를 하고 함께 자리에 누웠는데, 부인은 또 종대 얘기를 꺼냈다. 사실 이날 모임에 종대는 없었던 모양인데 부인은 모든 것을 종대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문건은 진저리를 쳤다.

며칠 후 이문건은 그만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한 모임에 갔다 와서 딴에는 농담으로 “오늘 기생 중에 예쁜 애가 없더라”고 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부인은 화를 내며 또 종대를 생각하고 그런다며 남편을 다그쳤다. 그러더니 초저녁이 돼서는 아예 아래채로 내려가버렸다. 이문건은 부인 김씨를 일러 ‘질투의 화신’이라고 적고 있다.

이문건의 일기 내용만 봐서는 조선시대 ‘칠거지악(七去之惡)’에 정말 ‘투기’가 있기는 했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김씨 부인은 투기가 부덕(婦德)에 어긋난다는 의식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김씨 부인의 개인적인 성격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또 이때가 비교적 조선 초기에 가까워서 여자들이 아직은 유교적인 도덕성에 그다지 심취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된다. 결국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이문건은 관기 종대와의 관계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문건 쪽에서도 평생 함께 살아야 할 부인과 나름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인류 역사가 남성 위주로 편재된 후 여자들은 사랑에 목을 매왔다. 남자들이 권력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데 반해 여자들은 사랑을 통해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질투란 사랑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여자들의 생존전략이다. 어찌 보면 질투만이 아니라 부덕도 사랑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여자들에게는 이 분야에 대한 노하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에게 권력을 위한 노하우가 있듯이 말이다. 권력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들의 사랑 전문성은 사랑 타령 정도로 치부됐다. 그러나 사랑과 평화가 점차 의미 있어지는 시대에는 그 노하우가 꽤 쓸모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