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펼친 한국 미술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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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09면

1. 공간 속을 흐르는 거대한 족자 형태의 회화로 빛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서세옥씨의 ‘사람들’

추석 연휴가 막 지난 지난달 27일 오후. 도쿄의 중심가인 긴자의 명물 ‘메종 에르메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시 공간인 8층 ‘르 포럼’에서 막을 올리는 ‘서세옥의 사람들’전(2008년 1월 6일까지)을 보러 온 인파였다. 세계적 패션 기업인 ‘에르메스’의 전시회는 초대받는 일 자체가 작가의 작품세계 평가에 명예가 되는 일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화가이자 동양화가인 서세옥(78)씨가 그 주인공이 된 것이다.

서세옥 ‘메종 에르메스’ 초대전

‘메종 에르메스’의 전시 공간인 ‘르 포럼’은 2007년 한 해의 주제를 ‘춤’으로 정했는데 서씨는 그 마지막 전시를 맡았다. 평생 수묵 작업을 추구해온 작가는 특히 춤추는 사람 묘사에 일가를 이뤘는데 그 춤의 세계를 도쿄에 펼쳐 보였다. 미색 은조사(銀造紗) 위에 그린 신작 ‘사람들’을 주요 작품으로 선보이면서 1978년부터 2002년 사이에 작업한 수묵화 12점을 함께 내놨다. 신작 제작 과정과 작가의 일상을 담은 영상 다큐멘터리 두 편도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2. 좁고 긴 복도 형태의 전시장을 활용한 아들 서도호씨의 설치가 아버지 서세옥씨의 작품 ‘사람들’을 돋보이게 했다.

거대한 설치미술 ‘사람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할 ‘사람들’은 그물처럼 얽힌 인간 군상이 그려진 폭 4m, 길이 50m의 반투명한 은조사가 전시장의 끝에서 끝으로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일종의 설치작품이다. 자상(字像)이 일치하는 수묵추상화 연작인 ‘인간’ 시리즈로 유명한 서세옥씨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평면 작업을 3차원화하는 데 관심이 있었는데 ‘메종 에르메스’가 설치미술가인 작가의 아들 서도호(45)씨와의 합동전을 제안하면서 그 첫 시도를 하게 됐다.

서도호씨는 이미 2005년 초에 ‘메종 에르메스’에서 ‘되새김(Reflections)’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연 바 있다. 같은 해 9월 서세옥씨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대규모 회고전 성격의 전시를 개최했는데, 이때 마침 이 전시를 보러 왔던 ‘메종 에르메스’의 관계자가 부자전(父子展)을 해보자고 의견을 낸 것이다.

3. 아들 서도호(왼쪽)씨와 아버지 서세옥씨.

처음에는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작품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 내용을 협의해 가면서 아버지의 전통적 작품을 아들이 현대적 감각의 전시로 기획, 설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고 전한다. ‘메종 에르메스’는 예술 창조를 통해 교감을 나누는 서세옥·서도호 부자의 모습이 전통 마구(馬具) 제작회사로 시작해 세대를 초월하는 패션기업으로 성장한 ‘에르메스’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어려운 공간 특성의 활용
도쿄의 ‘메종 에르메스’ 건물은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한 명소다. 이 건축물의 맨 꼭대기층에 있는 전시장 ‘르 포럼’은 전통적인 미술품을 설치하기에 그리 만만한 공간이 아니다. 상업빌딩 밀집 지역인 긴자 거리의 좁다란 부지에 건물을 세우다 보니 평면이 한쪽으로 긴 복도 형태를 하고 있는 반면, 두 개의 층을 하나로 터서 천장은 높다. 또한 외벽을 온통 유리 블록으로 처리해 다량의 빛이 건물 내부로 들어온다. 2005년 전시 때 이러한 어려운 공간 특성을 체험했던 서도호씨는 이번 전시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벽에 걸거나 바닥에 세우는 작품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지요. 결국 공간을 수직·수평적으로 적극 활용하는 역동성이 핵심이라고 결론지었지요. 그래서 착안한 것이 공간 속을 흐르는 거대한 족자 형태의 회화였고요. 투명한 천을 선택한 것은 해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작품에 반영해 시간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아버님이 평소에 하시던 작업과는 많이 다른 시도를 하면서 왜 망설임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 준비 전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관람객에게 보여주게 된 까닭입니다.”

삶의 모습을 찾아서
평소 서세옥씨는 “내 그림에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대상을 초월한 보편적 삶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런 작가의 바람이 전시 공간의 멋진 활용으로 실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협업 작업이 화제가 되고 주목받는 까닭이다.

천 위에 그려진 다양한 인간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림 속의 ‘사람들’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겹쳐져 관객과 작품이 하나 되는 장관이 빚어진다. 이번 전시는 서세옥과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전시장을 방문한 일본의 저명한 섬유예술가 레이코 수도씨는 “‘사람들’은 천이라는 소재가 한없이 유연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작품 속의 사람들이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느낌이다”라고 감상 소감을 밝혔다.

80년 화가 인생의 결정판
서세옥·서도호 부자 미술가는 이번 전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버지의 전시 한 귀퉁이를 맞들어 멋지게 완성시킨 아들이 이렇게 답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제가 마음 속으로 은근히 기대했던 것은 서세옥 80년 화가 인생의 결정판이 되는 작품을 뽑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완성되는 순간, 오히려 이 전시가 서세옥의 새로운 시작이란 걸 깨닫게 됐어요. 아버님께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린 것, 그 깨달음이 이번 전시를 통해 저희가 얻은 가장 큰 소득입니다.”


유승은씨는 한국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 독립 코디네이터로 국제미술계의 네트워킹 전문회사 ‘에스이와이아트넷(SEY ARTNET)’을 설립해 미국·일본·네덜란드 등에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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