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난 곳에서 사랑을 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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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12면

여섯 권의 소설을 남기고 마흔한 살에 죽은 제인 오스틴(1775~1817)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는 작가로 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오스틴이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은 결혼이 로맨스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가문의 재산과 지위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거래의 결과인 시대였고, 여성은 아내이자 누이이자 딸로서 남성에게 순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로맨스 담은 영화 ‘비커밍 제인’

그러나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맨스필드 파크''엠마'등에 흘러넘치는 세밀하고도 생생한 묘사를 보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것만으로 그 시대의 위선을 통찰할 수는 있겠지만, 그 모든 환멸 끝에 찾아온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마저 손끝으로 만져질 듯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영국 TV 시리즈 출신 감독 줄리언 제럴드가 연출한 ‘비커밍 제인’은 그런 질문에 답해주는 영화다. ‘비커밍 제인’은 막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무렵 제인 오스틴이 만난 사랑을 들려주며, 그녀가 어떻게 작가 제인 오스틴이 됐는지를 상상한다.
 
편지에서 찾아낸 오스틴의 첫사랑
문학사가들은 제인 오스틴이 한 번 청혼을 받았고 두 번 사랑을 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비커밍 제인’이 택한 로맨스는 그중 첫 번째 것으로, 그녀가 열아홉 살이었던 1795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만난 톰 리프로이와의 짧은 사랑 이야기다. 오스틴은 자신의 고향 햄프셔에 있는 숙부 집에 놀러 온 리프로이를 만난 다음 역시 독신으로 생을 마친 언니 카산드라에게 편지를 써서, 헨리 필딩의 소설'톰 존스'를 좋아하는 리프로이가 톰 존스처럼 경박한 색채의 코트를 입었다거나, 리프로이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전했다. ‘비커밍 제인’은 이 짧은 언급에 힘입어 눈부신 젊음을 지니고 있던 제인 오스틴에게 첫사랑의 열기를 불어넣는다.

가난한 목사의 딸인 제인(앤 해서웨이)은 여러모로 남다른 아가씨다. 우렁찬 피아노 연주로 전원의 아침을 깨우는 그녀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산보다는 사랑을 좇아 결혼하고자 하고, 예절을 지키기보다 할 말은 하고 사는 길을 택한다. 그런 그녀 앞에 런던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젊고 잘생긴 변호사 톰 리프로이(제임스 맥어보이)가 나타난다. 제인이 쓴 글을 두고 토닥토닥 다투던 두 사람은 차츰 서로의 지성과 개성을 존중하게 되고 톰이 런던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연인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의 앞날은 험난하기만 하다. 평생 가난에 시달린 제인의 어머니는 딸이 부유한 상속자 위즐리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가난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톰도 선뜻 제인과 결혼할 수가 없다.
 
그녀의 소설은 언제나 해피엔드
계절을 겨울에서 녹색 풀밭이 출렁이는 초여름 무렵으로 바꾼 ‘비커밍 제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눈이 부신 첫사랑의 이야기이자, 위트를 겨루는 스크루볼 코미디이고, 무엇보다도 한 위대한 작가의 창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상상해보는 일종의 팬픽션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앤 해서웨이가 커다란 눈동자를 깜박거리며'오만과 편견'의 한 줄을 써 내려가는 장면을 보며 흠모하던 우상을 대면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혹은 오만 방자해 보이지만 의외로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톰 리프로이를 미스터 다아시에 대입해 보며 그 그림자를 더듬어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이면서 동시에 관객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희열이다. '피터 래빗'시리즈의 작가인 베아트릭스 포터 곁에서 털이 보송한 갈색 토끼 피터 래빗이 뛰어다니는 영화 ‘미스 포터’나, 아이리스 머독의 생이 지닌 아이러니를 뼈아프게 회고하는 ‘아이리스’처럼, 작가의 삶과 문학을 한데 엮어낸 영화는 보물지도에 그려진 X표에 도달한 듯한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커밍 제인’은 사랑하는 감정과는 무관한,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깨진 사랑의 기억을 담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유머와 냉소, 무심하게 관조하는 듯하다가도 문득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 그리고 해피엔드. ‘비커밍 제인’을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슬픔을 품고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랑을 떠나보낸 제인은 약혼자를 잃은 카산드라와 소설 이야기를 한다. 사랑스러운 두 여인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제인에게 카산드라는 그들이 결국 결혼을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제인이 답한다. 자신의 소설은 언제나 해피엔드일 거라고. 가을처럼 깊은 갈색 눈동자를 지닌 제인은 그렇게 작가 제인 오스틴이 돼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해피엔드를 숱한 소설 속의 여인들에게 대신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사랑은 예술이 되고
그렇다고 ‘비커밍 제인’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탄하기만 하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다섯 명의 남자 형제와 어울려 자란 제인이 씩씩하게 크로켓을 하고, 제인의 오빠 헨리와 톰이 새하얀 알몸으로 강물 속에 뛰어들고, 십 몇 년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제인과 톰이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들은 사려 깊은 생기로 빛나곤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제인이 남긴 불멸의 소설 여섯 권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랑은 언제나 끝이 난다. 그러나 세상엔 사랑보다도 오래가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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