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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아닌 생존을 위한 ‘어두운 질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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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18면

미국 화가 조지 투커의 1950년 작 ‘지하철’. 철창과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하세계를 표현한 화가는 폐쇄된 공간에서 서로에게 공포를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다.

“낮에는 도시의 인간이란 피가 땅 아래로 흘러 심장으로 들어가고, 밤에는 이 지하의 관이 중심부로부터 덩어리를 비워내는 정맥이 된다.”-세넷, 1994

지하철 다시 보기 <1>

신화의 공간, 현실의 공간
예부터 지하는 명부(冥府)의 세계였다. 죽어서만 가는 곳이지,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이다. 오르페우스를 비롯해 숱한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를 찾으러 북망산도 넘어갔고 레테의 강도 건너갔지만, 그들은 바랐던 것을 얻지도 못한 채, 오히려 현세의 사람에게 배척을 받기에 이른다. 금기를 어긴 결과, 스스로 금기가 됐기 때문이다.

왕이었던 오르페우스조차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곳은 인간이 아닌 것이거나, 인간을 넘어선 존재만이 거주하는 이계인 까닭이다.

이계의 면모는 현대에도 형태를 달리해 흔적을 남겨 놓았다. 공포영화의 사건은 언제나 어둑한 지하실에서 일어난다. 얼핏 투명해 보이는 현실에 구멍이 뚫리며, 지금까지 ‘의식 밑에’ 눌러놨던 무엇이 괴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은 현대에 들어서 굳게 닫히게 됐다. 실제로 뚫려버렸기 때문이다. 지하철이 등장하면서, 신화적 공간은 현실적 공간으로 완전히 갈음됐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현대적 대도시의 ‘출현’과 ‘논리’와 밀접히 관련된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도시의 참된 모습만큼 초현실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결코 은유도 농담도 아니다.

지상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대도시의 밤하늘을 생각해보라. 인공의 조명은 대도시를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의 논리는 기술문명이고, 그것의 현현은 ‘인공현실’이겠다.

자연을 밀어내고 인공으로 구획된 거리, 그곳을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각종 철마들, 빈칸을 채우듯 솟아오른 갖가지 철골구조 등 인공의 질서와 산물은 곳곳에 새겨져 있고 채워져 있다. ‘지하철’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결과 가운데 하나다.

전도된 세계 형성
이러한 ‘지하철’은 오늘날 더 이상 적절한 용어가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지상세계와 견줄 만큼 자신만의 ‘지하세계’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지상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놀고 말하고, 심지어 잠까지 잔다. 지상에서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행위를 그대로 수행한다. 하지만 그곳은 은폐된 세계였다. ‘지하’에 마련된 세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형성되는 방식이 지상과 달랐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 크다. 즉 지상의 세계가 ‘길에 대한 터의 우위’를 바탕으로 구성됐다면, 지하세계는 ‘터에 대한 길의 우위’를 기초로 건립됐다. 세계 형성의 벡터가 전도된 셈이다. 그랬던 탓인지 사람들에게 그곳은 이동하는 통로지, 거주하는 터전은 아닌 것으로 비쳤다. 유목민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길에서의 삶은 보이지도 기록되지도 못했던 것이다.
정주민과 유목민의 대립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철마를 타는 유목민
생각해보면, 지하철만큼 현대적 삶의 형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공간의 범주에서 봤을 때, 현대인의 하루와 동선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현대인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자 마감되는 곳이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한 일상적 습관의 문제만도 아니다. 현대인의 일상을 압축해 보여주는 핵심적 상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다양한 장르에서 현대인이 과연 어떤 식으로 재현되는지 생각해보라.

떼 지어 이동하는 군중의 모습, 거기서 ‘개체’는 소멸한다. 이때의 ‘주체’는 개별인간이 아니라 거대하게 무리 지은 검은 점들의 행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아침저녁 지하철에서 명확하게 표현된다. 걷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이동하는 상황, 묵묵히 지정된 목표에 배달‘되는’ 사물에 가깝다.

“군중은 움직이는 장막이었다.” 말보다 훨씬 큰 차를 타지만, 의지와 의욕을 상실한 ‘유목민’이라고 하면, 농담일까 진담일까. 어쨌든 어떤 모습을 봐서도 세계를 헤아리며 다스렸던 ‘근대주체’의 모습을 찾기란 난망한 일이다. 그렇기에 지하철에서 일렬로 바삐 이동하는 군중은 ‘현대’의 완벽한 우의이겠다. “이 장막을 통해 보들레르는 파리를 보았다.”(베냐민)

역사의 굴곡, 장소의 기억
흥미롭게도 한국의 지하철은 역사의 굴곡을 뚜렷하게 새겨놓았다. 1호선이 1970년대 근대화를 알리는 깃발이었다면, 2~4호선은 80년대 거침없이 질주하는 산업자본주의의 상징이었고, 5~8호선은 90년대 본격 소비자본주의를 드러내는 신호탄이리라. 물론 호선들이 엄밀하게 시대의 궤적과 일치하진 않지만, 적어도 지하철의 ‘운동’은 자본의 ‘질주’와 대략 상응한다. 따라서 1호선부터 8호선까지 조금씩 구획되는 양상을 시간의 축에다 옮겨놓으면, 그것 자체가 약동하는 대도시 서울의 공간적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울의 큰 역사는 개인의 작은 기억과 자연스럽게 접속된다. 70년대 1호선으로 서울시 내외를 오고 갔던 민중들과 80년대 2호선으로 대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지하철을 동일하게 기억할 리 만무하다. 한 발 나아가, 세대와 노선이 아예 고착되는 양상 또한 드러난다. 예를 들어 1호선은 노인들이 상용할뿐더러 그들만의 생활공간으로 점령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지하의 노선을 넘어 지상의 지역까지 확장돼, 장소의 가치를 변용한다. 1호선 종로3가역과 파고다공원의 ‘접속’을 생각해보라. 이런 현상을 모든 세대와 모든 노선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개인별·노선별·지역별 기억의 ‘편차’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길 잃은 사람들
이렇게 형성된 지하철을 재현한 노선도도 흥미로운 대상이다. “지도는 계몽을 유발하는 도상적 표현이다. 하지만 그 계몽은 꼭 무엇을 단순화하거나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필립스) 그것은 과연 그 이상의 역설적 의미가 있었다. ‘전근대인’의 경우, 이 지도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스러워한다. 즉 지도에서 길을 잃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은 대형지도를 아랑곳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정보를 얻어 간다.

반면에 ‘현대인’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손쉽게 지도의 기호를 읽고 갈 곳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들의 행로와 목적지는 너무도 뚜렷해, 그들은 자신의 몸놀림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요컨대 현대인이 별다른 의식 없이 지하철이란 삶의 미로에 빠져든다면, 전근대인은 뚜렷이 의식해도 지하철이란 삶의 미로에 사로잡히는 셈이다.


김상우씨는 홍익대 미학과에서 매체예술을 연구하는 문화비평가이자 독립 기획자로 (사)문화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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