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26) 그녀에게 고개를숙이며 길남이 물었다.아무 대답없이 화순은 그냥 몸을 웅크리고있었다. 『등을 좀 두드려 드릴까요?』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려다가 멈칫하면서 길남이 화순의 앞에 가 몸을 구부렸다.화순이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얼마를 그렇게 앉아 있던 화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속이 안 좋아.요즘 들어 늘 이래.헛구역질만 나고 몸뚱이가다 썩었나 봐.』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던 화순이 길남에게손을 내밀었다.길남이 두 손으로 그녀의 내민 손을 잡았다.쓰러질 듯 겨우 몸을 일으킨 화순이 들릴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이 아주 크네.』 공연히 부끄러워하면서 길남이 손을놓았다.화순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으로 그 눈길을 마주보면서 길남은 그녀가 먼 어느 곳,자기 뒤편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좀 잡아 줄래.』 그녀의 어깻죽지 밑으로 팔을 넣어 부축하면서 길남은 천천히 방파제 위를 걸었다.이미 어두워진 바다는 파도소리 뿐,캄캄한 어둠 속으로 고깃배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젖가슴이 길남의 팔에 와 닿았다.부피가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부드럽게 와 닿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며 길남은 애써 고개를 들어 불빛이 환한 아파트 쪽을 바라보았다.
화순이 그의 턱밑으로 얼굴을 들며 말했다.
『어지러워.』 『술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소리없이,입꼬리를 올리면서 화순이 창백하게 웃었다.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였다.화순이 쓰러지듯 길남에게 몸을 기대면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화장냄새가 아니었다.여자 냄새에 휩싸이는 길남의귓가를 먼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바 람소리처럼 화순의 목소리가스치고 지나갔다.
『나 좀 안아 줘.』 길남의 손이 그녀의 등뒤에 얹히며,몸을지탱해 주듯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화순이 말했다.
『더 좀,꽈악,세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