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그리는 화가 이영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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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오후 길 그림만 그린다는 이영희(58) 작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하철 3호선 마두역에 내렸을 때는 살짝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저만큼에서 친근하고 자상한 웃음을 띤 영락없는 옆집 아저씨 분위기를 풍기는 이가 있었는데 꼭 나를 마중 나온 듯 했다. 이영희 작가가 여자일 거라는 확신은 온전히 그 이름 때문이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가 건넨 명함도 인상적이었다.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그 작은 종잇조각에도 길이 나있었다.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뒷면에는 행운의 네잎 클로버가 가지런히 코팅돼 있었다. 명함에서부터 길 그림 작가다웠다.


그의 작업실은 일산구 장항동의 작은 조립식 창고. 그가 내온 따뜻한 솔잎차를 마시며 인터뷰를 가장한 데이트를 시작했다. 모든 기자들이 물어봤을 법한 식상한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왜 길을 그리세요?”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길은 우리의 인생이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그 길을 걷기 시작해야 비로소 인생을 알 수 있고, 삶을 느끼게 되잖아요. 사람들이 그 길과 언덕을 넘어 희망을 찾아 꿋꿋하게 가듯 나도 그런 의미로 길을 그립니다.”
두 발로 밟는 길만 길인 것은 아니다. 하늘에도 길이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고 우리네 삶에도 무수한 인생길이 있다. 길이 곧 삶이요, 철학이라는 게 그의 ‘길 예술론’이다. 그가 마저 덧붙였다.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그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는 것이 우리네 삶과 어울리는 주제이지 않습니까?”
그가 길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1996년부터라고 한다. 본래 인물화를 주로 그리다가 ‘느낌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길을 그리기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단다. 그간 길을 주제로 한 전시회도 여섯 차례 열었다.
전시회에 내놓았던 작품들 중 유독 애착을 갖는 작품이 몇 점 있는데, 아까운 마음에 팔지 못하고 간직해 두었다고 한다. 정성이 너무 들어간 그림이라 돈에 맞춰 파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중 두 점은 MBC 아나운서 김지은씨와 강영은 아나운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해 주었다고 한다.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길의 이미지는 판타지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환상적인 길. 그 중에서도 영화 <킹콩>에서 섬을 배경으로 나온 바닷길이나 <슈퍼맨 리턴즈>에 나오는 해일이 일어났던 맑은 물길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판타지 속 길에 매력을 느낀다 해도 길의 원형적 모습은 여전히 그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아름다운 길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시골의 모든 길도 포장도로로 바뀌고 있죠. 자연의 길을 찾아볼 수 없어 너무 안타까워요.” 길이 길 그대로의 길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길은 향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 않던가.
향수의 길을 가슴 깊은 곳에 품은 그는 요즘 ‘북한의 길’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다. 내년에 ‘북한의 길’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 계획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북한을 다녀왔어요. 실향민에게 위안과 평안을 주는 길을 그리고 싶어요.” 그가 다시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았다. 화폭에 담길 길이 실향민의 길이며 곧 우리의 길임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혼신을 담은 붓놀림으로 다 그려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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