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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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22) 천천히 화순은 방파제 위로 걸어나갔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날린다.
무슨 바다 색깔이 저 모양이람.오늘같은 날은 멀쩡한 년도 바람나고 싶겠구나.저 해 떨어지는 거 좀 봐.
구름에 가려지면서 해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진홍빛 하늘은 조금씩 그 붉은 빛이 엷어져 가고 있었다.무슨 놈의 하늘이 저렇게 지랄같나 모르겠네.저건 아예 누구 가슴을 후벼파자는 노릇 아냐.오늘 술 안먹었으면 어쩔 뻔 했어.하늘도 저 런데,나같이치맛속에 바람이 술렁술렁하는 년은 이런 날 어쩌란 말인고.미쳐서 죽지 죽어.
저만큼 앞서 걸어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모습을 화순은 지켜보았다.무슨 공사에 쓰다가 남은 것인지,목재들을 쌓아놓은 곳에 사내는 걸터앉았다.그가 어깨를 웅크리며 머리를 떨구는 모습을 보면서 화순은 혼자 중얼 거렸다.저 자가 왜 하필 저기 앉는담.
한 떼의 갈매기가 무리지어 날아가는가 하더니,그들이 싸갈긴 똥이 발앞에 떨어졌다.화순이 하늘을 쳐다본다.
얘 이놈들아.내가 아무리 이렇게 살지만,나 오늘 똥맞을 짓 한 것 없다.못된 놈들.난 술 먹은 죄 밖에 없어.그것도 먹으라고 만든 음식인데 술먹은 것도 죄라더냐.그리고 봐라,이 놈들아.아 바닷빛이 저렇게 사람 애틋한 데를 후벼파는 데,나라도 술 안 먹으면 어느 년이 먹는다더냐.
취기에 싸여서 허청허청 걸어가며 화순이 자신에게 말했다.너 누구냐고? 나야 꽃이지.꽃은 꽃이다만 길가에 핀 꽃이지.꽃이고말고,그러니 밟고도 가고 꺾어도 가고.
사내 옆을 지나치다가 화순이 흘깃 사내를 보았다.
『이게 누구야?』 술기운에 화순이 반색을 한다.
『총각,나 몰라.나잖아.』 길남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겋게 된 화순을 올려다보다가 길남이 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난 또 누구시라구요.』 『원 사람도 덤덤하기는.알면 아는 체를 해야지.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아침 일 나갔다가 이제 막 들어왔거든요.』 『왜 무슨 상사병 날 일 생겼어? 남정네가 무슨 바닷바람을 다 쐬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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