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경제판례 해부] 5. '경영 판단'의 허용 범위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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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가 단체협약을 맺을 때 '노조의 경영권 참여'를 보장하는 합의를 했다 해도 이런 합의가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는 법원의 해석이 나왔다.

대법원 관계자는 1일 "현대자동차 노사가 지난해 합의한 단체협약 내용 중 경영권 참여 부분은 대법원 판례를 기준으로 볼 때 법적 효력이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본지가 지난달 27일부터 5회에 걸쳐 게재한 '2003 경제판례 해부' 시리즈와 관련해 대법원에 한 질의에 대해 이같이 답변했다.

◇경영권이 우선=현대차는 지난해 8월 노사분규의 진통 끝에 노조 요구를 대폭 받아 들였다. 노사는 단체협약에서 '노사공동 결정 없이 국내 공장의 축소.폐쇄나 정리해고.희망퇴직을 하지 않는다'고 전격 합의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현대차 노사가 단체협약을 맺기 불과 12일 전인 지난해 7월 22일 이 같은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한국가스공사는 1999년 구조조정 차원에서 3개 자회사로 분할한 뒤 1개는 계속 운영하고 나머지 2개는 민간에 매각을 추진했다. 그러자 노조는 이에 반대해 쟁의를 벌였고, 회사 측은 업무방해로 소송을 했다. 이 소송의 쟁점은 단체협약 내용이었다.

가스공사 노사는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체결한 단체협약서에 "공사를 분할.합병하거나 민간에 양도해 감원 등의 근로조건이 변할 때는 노조와 '사전합의'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단체협약에 '사전합의'가 있다 해도 '사전협의'의 취지로 해석한다"고 판결했다. 협의는 법적 구속력 없이 단순히 의논 절차만을 말하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다.

대법원 판례는 향후 관련 소송에서 사실상 '교과서'의 효력을 갖는다. 따라서 올 노사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민주노총 등은 올해 임.단협 협상 때 고용 보장을 위해 경영권 참여를 강조하는 지침을 내릴 계획으로 알려졌다.

◇경영권의 의미=대법원은 그동안 '경영권이 노동권에 우선한다'는 판례를 일관되게 남겼다. 대법원은 가스공사 판결문에서 "경영권과 노동권이 충돌할 때는 기업의 투자 의욕과 경제적 창의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전제하고 "우선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해법을)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결문은 이어 "구조조정이나 합병 등의 조치는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해 원칙적으로 노동쟁의나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가스공사 건 이외에도 이 같은 입장을 최근 2년새 다섯 차례나 밝혔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다만 기업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불순한 의도로 추진하는 구조조정은 안 된다고 했다. 법원은 "기업의 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는 크게, 멀리 볼 것을 주문했다.

대법원은 가스공사 사건과 관련, "근로자들의 노동3권이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과도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기업이 부실해지고 투자가 줄면 취업 기회가 적어져 실업이 증가할 것"이라며 "기업이 잘되고 새로운 투자를 해야 고용이 창출돼 기업과 근로자가 다 함께 승자가 된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야만 전체 근로자가 이익이 되고, 국가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시래.염태정.강병철 기자

<대법원의 '경영권' 정의>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제도와 경제활동에 관한 사적자치의 원칙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헌법 제23조의 재산권에는 개인의 재산권뿐 아니라 기업의 재산권도 포함되고, 기업의 재산권의 범위에는 물적 생산시설뿐 아니라 여기에 인적조직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종합체로서의 '사업' 내지 '영업'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 재산의 자유로운 이용.수익뿐 아니라 그 처분.상속도 보장돼야 한다. 한편, 헌법 제15조는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여기에는 기업의 설립과 경영의 자유를 의미하는 기업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의 취지를 기업활동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기업은 그가 선택한 사업 또는 영업을 자유롭게 경영하고 이를 위한 의사 결정의 자유를 가지며, 사업 또는 영업을 변경(확장.축소.전환)하거나 처분(폐지.양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이는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틀어 경영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003년 7월 '가스공사'사건 판결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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