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핑퐁제안 略史-成事 눈앞서 번번이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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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합의가 있기까지 남북간에는 그동안 정상회담을 열기 위한 여러차례 접촉이 있었다.
또 남북한은 정세가 악화돼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경쟁적으로 정상회담 제의를 내놓았다.
그러나 난마처럼 얽힌 민족현안을 풀기 위한 남북정상회담은 잦은 제의에 머물렀을뿐 의제등을 둘러싼 의견차로 정상회담의 높은고지앞에서 번번이 좌절됐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질적인 첫 노력은 3共 시절인 72년 5월 우리측 李厚洛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과 잇따른 북측 朴成哲 제2부수상의 서울 답방에 따라 성사된 7.4남북공동성명에서찾아볼수 있다.이에따라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가 서울.평양을 오가며 세차례 회의를 계속하고 그 전후에 적십자회담이 여섯차례나이어져 정상회담 문턱까지 이르렀지만 북측은 생각이 달랐다.
73년초 발생한 金大中 납치사건을 빌미로 북측이 남북대화의 일방적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5共에 들어와 全斗煥대통령은 81년 1월「남북한 당국 최고 책임자 상호방문과 金日成의 조건없는 서울방문」을 제의,최고책임자간의 직접회담에 나섰지만 역시 불발로 끝났다.
곧이어 벌어진 아웅산 사건등으로 긴장국면이 조성되며 정상회담실현을 위한 구체적 논의는「밀사외교」라는 물밑접촉으로 바뀌게 된다. 85년 가을 張世東안기부장과 許錟노동당비서의 平壤.서울비밀교환방문, 朴哲彦안기부장특보.韓時海노동당비서국부부장의 실무핫라인은 쌍방의 밀착을 이끌었지만 정상회담으로 마무리되지는 못했다. 실무대표들은 판문점에서 7월초부터 8월초까지 세차례 접촉을 갖고▲조기에▲평양에서 먼저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원칙엔 합의했지만 이듬해부터 계속된 우리의 직선제 개헌.인권.反美문제등정치.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자 북측은 정상회담에의 미련 을 하루아침에 내던져 버렸다.
그해 9월 남북적십자 고향및 예술방문단 교환이란 성과는 얻었으나「남북한당국 최고위급 회담」엔 실패했던 것이다.
6共이 출범하자 이번에는 북측이 정상회담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金日成은 88년 신년사에서 「쌍방 당국자 포함한 남북연석회의」제안을 내놓았고 2월25일엔 盧泰愚대통령이 정상회담을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盧대통령은 「7.7선언」을 통해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북측에 공식으로 제의했다.
이런 와중에 남북고위급회담이 성사될수 있었고 90년 9월에는북측 延亨默정무원총리가 서울을 방문하고 10월엔 우리측 姜英勳총리가 평양을 방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쌍방 총리의 서울.평양방문은 쌍방 정상들과의 접촉을 이뤄냄으로써 간접적으로 정상의 의사가 전달되기는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 의혹을 둘러싸고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면서남북한정상의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에서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金泳三대통령은 93년 2월25일 취임사에서『동맹국의 이익보다 민족의 이익이 앞선다』며 정상회담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북측 姜成山총리는 金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에「특사교환」제의로받았고 약간의 진통끝에 지난해 10월과 올해 3월에 특사교환 실무접촉을 여덟차례 가졌으나 핵문제로 진통을 거듭,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崔相淵.郭輔炫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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