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의 프리즘] 명절엔 제발 통행료 받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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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올 추석 연휴 전국에서 가장 장사를 잘한 곳은 어디일까요? ①극장가 ②백화점 ③도로공사 ④대형 할인점정답은 도로공사다. 9월 25일 추석 당일 전국 고속도로 통행 차량이 420만 대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당연히 통행료 수입도 가장 많다. 추석날 하루에만 자그마치 103억원을 거둬 갔다.

고속도로의 기능은 상실한 채 ‘저속(低速)도로’도 아닌 거대한 주차장이 돼 버린 길에서 비싼 기름을 태우며 잔뜩 열 받은 이용객에게서, 그것도 신용카드 결제가 아닌 대부분 현금 수입이다. 정액 고속도로 카드나 하이패스 전자카드로도 결제할 수 있다지만 이것도 다 미리 현금을 주고 사야 한다.

고향 가는 길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역시 귀경길이 문제였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11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평소의 몇 배, 지난해 추석과 비교해도 평균 한두 시간 더 걸렸는데 통행료는 꼬박꼬박 다 받았다. 그렇게 이번 추석 연휴(9월 21∼26일)에 도로공사가 2016만 대의 차량에서 거둔 통행료가 모두 541억원이다.

명절이면 왜 그리 고속도로가 막힐까? 귀성객과 이들이 이용하는 차량이 많기 때문이라고? 맞는 얘기다. 그렇다고 수천만 명의 고속도로 이용객이 심각한 정체 때문에 허비하는 연료와 시간, 스트레스를 모른 체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와 공기업이 할 일이 아니다. 일일이 계량화하기 어렵지만 명절 연휴 체증에 따른 손실 비용이 엄청나고, 후유증도 오래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고속도로 체증과 그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중 하나로 적극 검토할 만한 게 추석·설 등 명절 연휴기간 고속도로 통행료 징수 면제다. 통행료를 받지 않으면 진·출입로 몇㎞ 전방부터 늘어서는 차량 행렬이 줄어든다. 또 그 행렬이 다른 차선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도 막는다.

아울러 이용객이 좀 더 일찍 가족·친지를 만나 정을 나눌 수 있어 스트레스를 덜 받고 경제 하는 마음에도 상처를 덜 준다. 사실상의 감세 효과를 내 부모님께 용돈 더 드리고 선물도 큰 것으로 준비하는 등 내수 경기에도 보탬이 된다.

명절 연휴기간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하자는 유료도로법 개정안은 2004년 11월 국회에 상정됐으나 여태 낮잠을 자고 있다.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 등 의원 17명은 “극심한 정체로 사실상 고속도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행료를 부과하는 것은 과도한 징수권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추석 연휴 도로 위에서 낭비한 기름값이 330억원, 대기오염 등 사회적 비용까지 감안하면 약 1000억원의 혼잡비용이 발생하므로 통행료 감면(2004년 추석·설 연휴 합쳐 450억원)에 따른 국가적 이익이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도로공사의 재무구조가 나빠진다는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해 의원들은 도로공사의 2003년 수입이 7조1257억원인데 이 중 도로관리수익이 2조3310억원, 당기순이익이 652억원이므로 450억원의 통행료 면제가 가능하다고 맞섰다. 주5일 근무제 확대 실시로 통행료 수입이 늘어나 도로공사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점을 덧붙였다.

‘국도·지방도 이용 차량이 고속도로로 몰려 체증이 악화된다’ ‘면제 기간 중 교통량이 집중돼 연휴기간 전후로 교통량이 분산되지 않는다’는 반대 의견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용객이 선택할 일이다. 대만에선 벌써 10년 넘게 춘절 연휴(3일간)에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과천시가 처음으로 이번 추석 연휴에 과천∼의왕 간 고속도로 통행료(800원)를 면제했다. 귀경길에 수원으로 빠져나와 그 길을 탔는데 좀 막히긴 해도 800원을 내지 않는다는 ‘기쁨’에 피로가 가셨다.

고속도로에서 ‘고속’을 보장받지 못하면 이용자만 이중으로 비용을 부담하는 격이다. 완전 면제가 정 어렵다면 정체 정도에 따라 통행료를 차등 징수하는 식으로 시작해 효과를 측정하는 방안도 있다.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갈아타며 출퇴근할 때 녹음된 목소리로 나오는 ‘환승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추석·설 연휴 통행료는 받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보고 톨게이트를 속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고객들은 엔도르핀이 나와 명절 스트레스를 그만큼 덜 받을 게다.

양재찬·편집위원[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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