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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이건희 회장의 질책, 김종갑 하이닉스 사장의 공멸론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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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현재 건설 중이거나 투자가 확정된 300㎜ 웨이퍼 반도체 라인만 세계적으로 36개다. 모두 가동되면 가격 폭락으로 업계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
김종갑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은 지난달 29일 기자와 만나 이렇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전 세계 반도체 메이커가 앞다퉈 반도체 생산라인 (Fab) 증설에 나서면서 관련 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2003년 이후 반도체 호황 덕분에 기사회생한 미국·일본·독일·대만 등 해외 경쟁업체들이 증설 경쟁의 선두권에 있다. 반면 ‘메모리 종주국’이란 국내 업계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해외 경쟁 업체들보다 6개월∼1년 앞선 기술력에 힘입어 경이로운 ‘30%대 영업이익률’을 구가하던 삼성전자의 이익률은 올 2분기 이래 10%대 중반으로 곤두박질쳤다.

◆반도체 시장에 전운=1990년대 벌어진 반도체 전쟁에선 한국 업체들이 압승했다. 당시만 해도 후발 업체였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는 공격 투자로 일본 업체를 압박했다. 삼성전자는 98년 세계 메모리 시장의 15.4%를 차지하며 선두로 뛰어올랐고 현대도 5위권에 합류했다. 2000년대 초반 벌어진 ‘2차 반도체 대전’ 역시 행운의 여신은 한국 기업 편에 섰다. 미국발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는 위기를 맞아 2000년 543억 달러이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불과 1년 만에 269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그 여파로 NEC·후지쓰 등 일본 업체들이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뗐지만 한국 기업들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 덕에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하이닉스(한국), 인피니온(독일), 마이크론(미국), 엘피다(일본) 등으로 재편됐다. 이 같은 구도는 지난해 하반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국내 업체들이 방심한 사이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한숨 돌린 미국·일본·대만 등 해외 업체들이 공개적으로 ‘타도 삼성’을 내걸고 선전포고를 한 것.
일본 엘피다는 이를 위해 올해 초 대만 파워칩과 손잡고 D램 합작법인을 세웠다.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에 이어 2위인 일본 도시바도 지난달 미국 샌디스크와 함께 대규모 낸드플래시 공장을 만들었다. 대만의 파워칩 황충런(黃崇仁) 사장은 “삼성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라고 공언했다. 도시바 경영진도 “삼성을 넘어서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9월 30일자 중앙SUNDAY는 특종기사 ‘이건희 삼성 회장 격노’를 통해 경쟁업체의 도전에 직면한 삼성전자의 현황을 심층 보도했다.

◆쫓기는 삼성전자=삼성전자는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점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뒤 후발업체들이 따라올 즈음에 대량생산으로 값을 떨어뜨리는 전략을 써 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올 7월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을 강하게 질책한 것은 이 같은 ‘선순환 구조’가 흔들린 때문이다. 하이닉스와 엘피다 등은 기술 면에서 고작 석 달 차이로 삼성전자를 바짝 뒤쫓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60나노 공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불량률이 높아지면서 1분기 메모리칩 출하량이 4억6000만 개에 그쳐 하이닉스에 1000만 개 뒤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2분기 영업이익은 3300억원에 그쳤다. 최근 5년 만에 최악의 ‘성적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유의 정전 사태를 맞기도 했다. 8월 중 반짝 상승세를 보였던 메모리 가격도 9월 들어 다시 하락세로 반전했다.

◆정면 승부로 돌파한다=삼성전자는 올해 신입사원 모집 규모와 인력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반도체에서만 3분기 80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하반기에는 회복할 것으로 기대했던 증권가에서도 “내년 초까지 어려움이 이어질 수도 있다”고 전망을 수정했다. 다행히 국내 반도체 메이커들이 이대로 주저앉을 것으로 보는 의견은 거의 없다. 하이닉스는 지난달 말 현물시장에 D램 공급을 전면 중단했다. 생산량의 15% 정도인 현물시장 공급분을 고정 거래처로 돌리겠다는 의도다. 김종갑 사장은 “손해 보면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치킨 게임’은 하지 않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분기 중 대만의 파워칩·난야·프로모스와 유럽의 키몬다 등은 매출액 대비 25~40%에 달하는 손실을 봤다. 삼성전자는 물량 조절보다는 아직 가격이 좋은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회사 관계자는 “1Gb D램과 8Gb 낸드플래시 비중을 연말까지 30~4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당면 목표”라고 말했다.

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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