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아시아 1위’ 카드사 출범시킨 라응찬 신한금융 회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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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18면

중앙포토

라응찬(69)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최근 임원 몇을 불러 점심을 함께했다. 신한카드와 LG카드의 합병을 앞두고 그 사령탑을 맡은 이재우(57) 통합 신한카드 사장을 격려하려 마련한 자리였다. 이 사장이 “20년 전 처음 지점장으로 나갈 때의 초심으로 통합 신한카드를 이끌겠다”고 각오를 밝히자, 라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젠 밖으로 나가 투자은행 사업할 차례”

“직원들의 마음부터 사시오.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 급선무예요. 그러자면 직원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핫라인을 꼭 만드시오.”

10월 1일 아시아 1위(이용액 기준), 세계 10위의 초대형 카드사(자산 기준 17조원)가 될 통합 신한카드가 탄생한다. 이 회사의 고객 수는 무려 1300만 명을 넘는다. 이런 엄청난 작업에 불협화음이 없었을 리 만무했다. 이 사장이 대표로 내정된 후 LG카드 노조가 거세게 반발했다. 통합 후 인사제도가 화근이었다. 신한카드와 LG카드 양측의 합의로 이뤄진 신(新) 제도에 LG카드 노조가 “지주사가 간여해 신한카드에 유리하게 인사제도를 만들고 있다”며 파업결의까지 하고 나섰다. 이 사장은 노조를 설득해 가까스로 합병을 마무리 짓긴 했지만, 직원에 대한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그 마음을 읽은 라 회장이 “직원의 마음을 사라”고 조언한 것이다. 이 사장은 다음날 부서장들을 불러 “나만 섭섭한 게 아니라 직원들도 섭섭했을 것이란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통합 카드사의 이름을 짓는 데도 라 회장은 행여 LG카드 직원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고심했다. 신한이 인수했으니 당연히 ‘신한카드’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라 회장은 “제3의 브랜드 명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나도 평생을 바친 신한의 이름을 쓰고 싶지만, 모두를 껴안으려면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사내외 공모를 통해 30만 건이 넘는 아이디어를 얻고 브랜드 컨설팅도 받아 ‘러브카드’란 이름으로 광고 시안까지 만들었다. 막판에 ‘러브’의 어감이 좋지 않다는 실무진의 의견을 존중해 ‘신한카드’로 최종 확정하면서도 라 회장은 아쉬움을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LG카드 인수는 동화은행·굿모닝증권·조흥은행 인수에 이어 라 회장이 신한의 영토 확장 전사(戰史)에 그은 큰 획이다. 지난해 8월 LG카드 입찰제안서 제출 마감날, 산업은행 본점에 있던 신한금융 담당자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주당 인수가격을 100원 단위까지로 준비해 갔는데, 라 회장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10원 단위까지 제시한 새 인수가격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라 회장이 10원 단위 숫자까지 준 것은 끝자리 세 수를 더해 9가 되는, 속칭 ‘가보’ 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가보는 전통 놀음판에서 힘센 수로 통해 왔다. 그래서인지 신한금융은 하나금융을 따돌리고 ‘천만인의 카드’를 손에 넣었다. 무려 7조원짜리 공룡 카드사를 인수하면서 겨우 70억원 차이로 경쟁사를 제치자, 금융가에선 ‘가보 패의 승리’라며 놀라워했다.

라 회장의 ‘가보’ 만들기는 끝자리까지 꼼꼼히 따지는 베테랑 뱅커의 치밀함과 동물적 직감이 빚어낸 황금 숫자였다. ‘신산(神算·신의 계산)’이라 불릴 만하다.

조흥은행 인수 후 LG카드를 목표로 잡은 것부터가 치밀한 계산이었다. 당시 회생에 성공한 LG카드는 13조원대 자산으로 1조원대 순익을 내고 있었다. 신한은행이 180조원 자산으로 1조7000억원의 순익을 올리던 것에 비하면 그런 알짜가 없었다. 하나금융과 우리금융이 외환은행에 매달리는 동안 라 회장은 일찌감치 LG카드로 시선을 집중했다. LG카드를 너무 비싸게 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수익 규모로 보면 크게 남는 장사였다.

라 회장은 올해로 48년간 은행원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1959년 농업은행을 시작으로 대구은행을 거쳐 82년 신한은행 창립을 주도했다. 91년 신한은행장이 된 후 세 차례나 행장을 연임하고, 2001년 신한금융지주가 출범하면서 회장에 취임했다. 최고경영자만 장장 17년째다.

그 사이 신한금융도 급속도로 성장해왔다. 신한금융의 총자산 규모는 현재 259조원대에 이르며 올해 당기순이익도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2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라 회장은 ‘계산된 도박’으로 신한금융의 외연을 키웠고 국내 은행의 경영모델이 된 ‘신한웨이’를 닦으며 내실을 다졌다.

그의 성공 비결은 ‘인본주의’였다. ‘신산’으로 불리는 라 회장이지만, 절대로 사람을 두고는 계산하지 않았다. 인수 후 성공적으로 합병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비결도 그것이다. 2003년 합병을 반대하는 조흥은행 노조가 파업농성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새벽에 경찰 투입이 강행되려는 순간 라 회장이 막아섰다. 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경찰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으며 마음에 상처받은 직원들과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느냐”는 게 이유였다.

그 후에도 합병까지 꼬박 2년을 기다리며 두 은행이 의견차를 좁힐 수 있도록 했다. 라 회장은 합병에 반기를 들었던 조흥은행 출신들을 신한금융지주의 핵심 부서에 두루 배치했다. 포용력의 카리스마였다. 조흥은행을 인수한 후에도 그는 “적·서를 구별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했다.

라 회장 리더십의 8할은 눈물이다. 98년 동화은행 인수 땐 새벽까지 일하던 직원이 엘리베이터에서 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엔 모친상을 당한 회장 운전기사를 위로하러 문상을 다녀와 직원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흥은행 출신의 한 인사는 “처음에 신한은행 사람들에게서 ‘회장이 불 속으로 뛰어들라면 우리는 정말 뛰어들 준비가 돼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님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어떤 인사청탁이나 파벌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도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였다. 신한은행 창립 초기 상무였던 라 회장은 당시 김준성 부총리로부터 아는 사람을 입사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김 전 부총리는 라 회장이 대구은행 재직 시절 행장이었고, 라 회장은 그의 비서실장이었다. 이희건 신한금융 명예회장에게 라 회장을 신한은행 창립멤버로 추천한 사람도 바로 김 전 부총리였다. 그러나 라 회장은 “이 청탁을 들어주면 다른 청탁을 물리칠 명분이 없다”며 끝내 옛 상관을 민망하게 했다. 당시 김 전 부총리는 “라 상무는 참 독한 사람”이라며 “내 부탁마저 거절할 정도니 은행이 잘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지난달 김 전 부총리가 별세했을 때 라 회장은 상주처럼 빈소를 지켰다.

야간 상고에 다녀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라 회장은 정직하고 성실했다. 최고 자리에 올라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늘 떠날 준비를 했다. 2003년에는 “조흥은행 합병이 마무리될 때까지만…”이라는 말로 퇴임 의사를 표명했었다. 그러나 LG카드 인수로 그는 다시 신발 끈을 매야 했다. 한동안은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수 없게 돼버렸다. 자리가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벌이는 일이 그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는 격이다. 그는 지금 고희의 나이에 인생의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라 회장이 있었기에 신한금융은 지금 국내 대표 종합금융그룹으로 탈바꿈했다.

그가 통합 신한카드에 거는 기대는 크다. “카드사업은 ‘금융업의 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꽃을 피우는 것이다.” 신한금융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세졌지만, 숙제도 적지 않다. 신한카드의 덩치가 ‘아시아 1위’라지만 아직 ‘한국인들만의 카드’다.

신한금융 전체로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로 봐야 한다. 그래서 라 회장은 다음 발걸음을 글로벌 사업 쪽으로 돌리고 있다. 해외 은행들을 대상으로 인수·합작·지분참여에 적극 뛰어들고, 이머징 마켓에서 IB(투자은행)사업도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라 회장은 앞길이 평탄치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하며 다시 한번 서로를 챙기자고 주문했다. “숲을 헤치고, 계곡을 건너고, 비탈길을 오를 때 동료를 생각하라.” ‘신산’의 계산이 해외 시장에서도 통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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