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승 고지 "달려가자, 愛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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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박태종(39)은 한국에서 말을 가장 잘 타는 사내다. 푸른색 바탕에 노랑과 빨강 줄무늬가 새겨진 상의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선행마(초반부터 선두로 나서는 마필)건 추입마(막판 추월에 강한 마필)건 가리지 않는다. 1987년 4월 데뷔 이후 거둔 승수만 9백99승(30일 현재). 1천승 고지까지 이제 꼭 한 계단. 그는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즈믄의 고지에 오르기 위해 31일 과천 경마장에서 레이스에 나선다. 대기록 달성을 앞둔 박태종 기수를 지난 26일 경마장에서 만났다.

*** 17년간 복승률 28.4%

◆기록 제조기=박태종은 17년 가까운 세월을 말과 함께 보냈다. 그동안 그가 세운 기록은 말하기만도 숨차다. 개인 통산 최다승(9백99승)은 물론 한해 최다승(1백2승), 한해 최다출전(5백80전)기록도 갖고 있다. 6천7백54회(30일 현재)나 레이스를 펼쳤고, 승률 14.8%에 복승률(1~2착 달성률)도 28.4%나 된다(표 참조). 10차례 경주에 나서면 1~2등으로 들어올 확률이 세번가량 된다는 뜻이다. 말에 오를 때마다 한국 경마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다른 비결은 없어요. 남들보다 말을 많이 탔으니 어쩌면 당연하지요."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는 성실함이 오늘의 박태종을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이야기한다. 박태종은 경주가 없는 날에도 이른 새벽 경기도 평촌의 집을 나와 오전 6시면 과천 경마장에 도착한다. 말의 컨디션을 점검하고, 훈련시키며 특성을 파악한다. 눈이 오건, 비가 오건 3시간 동안의 오전 일과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다. 말의 특성과 성격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놓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오전 일과를 마치면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집 근처 체육관으로 향한다. 전문 강사의 지도에 따라 상체와 하체 단련에 주력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선 목마를 탄다. 머릿속으로 레이스 장면을 그리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기승술을 몸에 익힌다.

*** 키 1m47㎝ 몸무게 46㎏

"날마다 똑같은 일과의 반복이지요. 약속은 주로 점심시간에 하고,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들어요. 그래서 17년 동안 9시 뉴스를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물론 술과 담배는 입에 대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작은 거인=1m47㎝의 키에 몸무게는 46㎏. 웬만한 여성보다도 체격이 작다. 역설적으로 경마 기수가 되기 위한 최적의 체격조건을 갖춘 셈이다.

"몸무게가 55㎏이 넘는 기수는 경주를 앞두고 사나흘씩 굶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는데도 몸무게에 큰 변동이 없어요. 오히려 살이 빠질까 고민이라니까요."

작은 체구가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박태종이 있었을까. 충북 진천군 덕산면 출신의 박태종은 고교 시절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키가 작은 탓에 손잡이가 잡히지 않아 통학길이 고생길이었다.

"그때는 키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요.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고요. 학교를 졸업한 뒤 포클레인 중장비 학원에 다녔지만 워낙 체구가 작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서울에 올라와 이모집에 얹혀 살던 것은 86년 무렵이었다. 이모부가 기수 후보생 시험을 볼 것을 권했다. 응시자격은 '키 1m60㎝ 이하, 체중 48㎏ 이하'였다.

당장 응시원서를 냈다. 필기시험과 체력 테스트까지 합격했지만 면접시험에서 떨어졌다.

"제가 원래 말을 잘 못해서…. 그래도 희망이 보이더라고요. 작은 체구가 유리하다니 이런 직업이 또 있을까 싶었지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다음해를 준비했어요.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달리기도 하고."

이듬해인 87년 그는 기수 후보생 13기 시험에 합격해 꿈에 그리던 말을 타게 됐다.

◆2천승을 향해=박태종은 데뷔 첫해인 87년 10월 처음으로 우승한 이후 91년 개인 통산 1백승 기록을 세웠고, 94년엔 최우수 기수로 뽑혔다.

95년엔 낙마 사고로 오른쪽 무릎 인대가 끊어졌지만 다시 일어섰다. 오른쪽 무릎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거듭한 끝에 이듬해엔 한해 통산 최다승인 1백2승을 올렸다. 그리고 98년. 팬클럽 회원이 소개해 준 아가씨를 만나 6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박태종은 요즘 아내 이은주씨와 딸 수정(6)의 손을 잡고 주말마다 성당에 다닌다. 체력이 닿는 한 기수 생활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 "환갑 넘어까지 타고 싶어"

돈은 얼마나 벌었을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63빌딩 옆에 빌딩을 짓기 위해 기초공사하고 있다고 얼버무리곤 해요. 부모님 집 사드리고, 저도 보금자리 마련하긴 했지만 그렇게 큰 돈을 모으지는 못했어요."

박태종은 "환갑이 넘어서도 계속 말을 타고 싶다"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정제원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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