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성] '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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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병원의 환자 의자와 이발소 의자가 비슷하게 생긴 연유가 인간의 털에서 비롯됐음을 아는가.

사연은 이렇다. 중세 유럽에는 '목욕술사'가 있었다.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몸을 씻어주고 남자 손님일 경우에는 몸의 털을 깎거나 다듬어줬다. 그러다 이들은 당시 만병치료법으로 알려진 '피 뽑기'일도 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부 목욕술사이자 면도사들은 의학 지식을 얻어 외과의사로 변신한다. 이후 목욕술사와 외과의사들은 영역 싸움을 벌였고 18세기 중반까지 치아를 뽑거나 피를 뽑는 일은 목욕술사의 독점 영역이 된다. 치과의사와 이발사가 본래 한 뿌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면도는 언제부터, 왜 하게 되었을까.

약 2만년 전 면도용으로 갈아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돌이 발견된 것이 고고학적으로는 최초의 흔적이다. 당시 면도를 한 까닭은 알 수 없다. 고대 이집트에서 수염은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왕의 주변인들은 반드시 면도를 해야했다는 기록이 있어 면도의 기원은 권력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독일 역사학자 다니엘라.클라우스 마이어 오누이가 쓴'털'은 이처럼 체모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다. 수염.머리카락에서 눈썹.속눈썹.겨드랑이 털.다리 털.음모에 이르는 모든 털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정치.경제.사회.예술.종교 영역을 넘나들며 설명한다.

이 책은 왜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호치민.레닌.카를 마르크스 등 좌파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수염을 길렀는지, 그리고 지금의 좌파는 왜 그 전통을 버렸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중세에 많은 여성들이 수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늑대 여인'으로 몰려 처형된 까닭과 인조 속눈썹.염색.파마.가발의 기원도 적고 있다. 빨간 머리를 투지와 힘의 상징에서 음탕한 여인의 특징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여성해방론자들의 표시로 인식하는 역사의 변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책은 은연중에 털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키거나 숨겨야 할 대상이 되며 이념과 저항의 상징, 권력과 지위의 표상, 그리고 성적 매력의 원천으로 인간의 삶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에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표피적인 수준이라고 역설했다. 행동 양태에는 별반 차이가 없으며 차이가 있다면 고작 몸통에 털이 있고 없고 정도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모리스가 '사소한' 것으로 취급했던 바로 그 털의 심오한 의미를 역사적 지식을 통해 살려낸다.

참고로, 저자들은 구약성서에 대머리를 놀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대목을 내세워 앞 머리 숱이 적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편 최근 수십년 동안 서구에서 대머리 정치인이 국가 지도자로 선출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덧붙인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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