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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갈등과 혼란(「파라슈트 키드」의 낮과 밤: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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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높은문화의 벽 “물위의 기름”/교포학생 마저도 소 닭보듯/귀국해도 서울친구들이 안만나줘 소외감
『미국이 싫다. 기숙사감이 죽이고 싶도록 밉다.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버드에 보내겠다고 나를 여기 보낸 부모님도 싫다.』
미국 명문 사립고 9학년에 재학중인 K군(16)의 지난해 10월14일 일기장 한 구절이다.
K군은 93년 1월 서울 강남 H중을 전교 3등의 성적으로 마쳤다. 『그도 실력이면 하버드대 입학은 누워 떡먹기』란 뉴욕에 사는 고모의 부추김에 조기 유학을 결정했다.
K군이 입학한 곳은 1백20년 전통을 자랑하는 보스턴의 D사립고교. 공부 하나만은 어디에 가도 자신이 있었던 K군이었지만 막상 입학하고보니 자신있는 과목은 수학밖에 없었다. 영어·역사 등 모든 수업이 토론식이고,숙제는 몽땅 리포트를 써야 하고,시험은 주관식으로 이루어지는 미국수업 방식은 암기식에 익숙한 K군에게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이틀전 기숙사감으로부터 식당마루 청소 벌을 받은 것도 문제는 공부였다. 저녁을 먹고 오후 8시부터 10시30분까지 공부방(Study Hall)에서 숙제한뒤 방에 돌아가 밤 11시 소 등 시간을 지키지 않고 공부했다는 것이 벌을 받게된 이유였다.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되는 곳이 미국이에요. 왜 규칙을 지키지 않았느냐는 거지요. 더듬거리는 영어로 공부가 모자라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어요. 모자란 부문을 보충하려면 학교에 과외공부(Tutoring)를 신청하라는 거예요.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더니 위로 해주기는 커녕 학교에서는 규칙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오히려 충고까지 하는거 있지요.』
K군은 미국에 온지 1년반이 지난 이제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직도 마음속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시험때마다 찍기 과외선생을 부르고,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요령도 통용되고,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효로 받아 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목적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미국사회의 이질적인 문화에 진입할 때 「파라슈트 키드」는 대기권을 넘나드는 만큼이나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된다. 적잖은 경우 이 과정에서의 좌절이 탈선으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마약으로 연결되기도 한다고 비행청소년 상담을 맡고 있는 시카고 가나안교회 김광근전도사(34)는 말한다.
시카고 사립S고교 10학년 P군(17)을 학교 상담실에서 만났다.
감청색 바지에 와이셔츠와 줄무니 넥타이를 단정히 맨 P군은 도무지 말이 없고 풀이 죽어 있었다.
외국인학생 상담교사 패킹씨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주1회 정기적으로 불러 외국인 학생이 겪은 경험들을 들려주고 있지만 별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P군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귀머거리·장님의 지옥이 시작됐다고 했다.
과목에 따라 이 교실 저 교실 옮겨다녀야 하는 탓에 P군은 하나의 수업이 끝날 때마다 미아가 돼 학교 복도를 헤매고 다녔다.
『처음 이틀은 밥도 굶었지요. 식사때만 되면 학생들이 없어지는데 어디를 가는지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요.』
2년이 지난 이제 제법 영어에 익숙하지만 여전히 미국선생·학생 앞에 서면 두렵다.
머리속에선 맴도는 말들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P군이 상담을 끝내고 방을 나서다 만난 다른 학국유학생이 묻는다.
『맨날 그말이지 뭐.이따가 피자집에서 만나자.』
P군은 서울의 부모를 졸라 1월 한인타운 근처에 월세 6백달러의 방 한칸짜리 아파트를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학교밖에서 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 학교에서도 한국유학생들끼리 어울려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못해 밥굶기도
P군은 방과후 시간을 거의 다른 유학생들과 보낸다. 그의 자취방은 걸어서 5분거리에 한국음식점·술집·당구장 등이 있어 종종 또래 유학생들이 모이는 집합소가 된다.
P군도 처음에는 미국친구를 사귀려고 무척 노력했다. 미국친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햄버거도 사주고 선물도 자주 했다. 주말이면 옷차림도 미국친구들처럼 헐렁한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었고 조건부 운전면허(Provisional License.보호자가 옆에 타야 운전할 수 있는 면허)를 따 혼다 새벽에 미국친구들을 싣고 영화관으로,농구장으로 몰고 다녔다.
그러나 공부를 도와달라거나 한국친구들 같으면 어렵지 않게 도와줄 일도 「집에서 설거지할 차례라느니 잔디를 깎아야 한다느니」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정나미가 떨어졌어요. 역시 한국사람은 끼리끼리 모여 살아야 한다는 걸 실감했지요.』
그러나 P군은 방학때마다 찾아가는 서울에서도 예전과 달리 소외감을 느낀다. 지난 겨울방학에 나갔을 때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엄마가 너를 만나지 말래.』
『학원에 갔다』 『심부름 갔다』는 말에 10여차례나 전화건 끝에 직접 전화를 받은 중학교친구 C군은 어머니가 『미국물든 애를 만나면 공연히 바람든다』며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P군은 서울에 가서도 같은 처지의 유학생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조기유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문화갈등중 큰 몫은 서로 「소 닭보듯」하는 교포학생과의 반목과 질시다.
『유학생들은 점심 먹을때도 자기들끼리 모여앉아 먹고 미국아이들하고는 어울리려 하지도 않아요. 열심히 공부하는 유학생들도 많지만 좋은 차와 용돈을 펑펑 써대는 학생들을 보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버는 교포학생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아요.』 중2때 이민간 미아 김양(18·세인트 베네디트고교 12학년)은 8학년때 한국유학생들이 1∼2명일 때만해도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놀기도 했는데 요즘은 서로 「물과 기름」같다고 했다.
○배타적 집단형성
『느끼해요. 혀를 굴리면서 미국애들하고 어울리면 피가 바뀝니까,머리가 노래지고 코가 높아집니까. 거기다가 유학생들을 업신여기는 꼴하고….』
같은 학교 조기유학생인 10학년 P군(18)은 자신의 학교는 사립으로 규율이 엄격해 물리적 충돌은 없지만 공립학교의 경우 유학생들과 교포학생들이 편싸움을 벌일 정도로 반목이 심하다고 전했다.
P군의 말로는 유학생들은 교포학생을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동양인을 멸시하는 속여)라 부르고 교포학생들은 유학생을 ET(외계인)라 부른다고 했다.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학생들과는 물론 교포학생과도 적응을 못해 외토리 집단이 되기 심상인 유학생들. 그들중 일부는 마치 외부와 단절된 죄수들처럼 같은 집단안의 규율을 만들어 때때로 구타·기합 등의 부작용을 빚기도 한다.<이석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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