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자존심과 해외 팬들 사이에 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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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03면

한국 사극(史劇)에는 아역들이 등장하다가 성인 역할이 나올 때 시청률이 오르는 경우는 없다는 불문율이 있다. 화제를 몰고 다닌 사극 ‘주몽’이나 ‘대장금’도 아역이 성인으로 바뀐 직후에는 주춤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배용준

하지만 ‘욘사마’ 배용준은 역시 달랐다. 19일 방송 4회째를 맞은 ‘태왕사신기’는 아역 배우 유승호가 배용준으로 바뀌면서 시청률 30% 선을 돌파했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지는 기세다.

300억원의 제작비(세트 제작비 130억원은 별도)가 투입된 ‘태왕사신기’에는 지난 3년 내내 한국과 여러 주변국의 관심이 쏟아졌다. 한류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 배용준이 ‘겨울연가’ 이후 처음 출연한 드라마라 그의 출연료가 회당 1억원 수준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와 입을 쩍 벌리게 하더니 최근에는 ‘회당 2억원설’까지 나와 관계사들이 급히 해명에 나설 정도였다. 출연료는 1억원 미만이지만, 초상권과 부대사업권을 보태면 배용준에게 돌아가는 돈이 약 50억원 정도라는 것이 정설이다. ‘태왕사신기’가 24부작이니 어쨌든 회당 2억원 이상을 버는 셈이다.

그림자도 있다. ‘태왕사신기’는 비록 판타지를 지향하고 있지만 주인공 광개토대왕을 ‘환웅의 현신’, 혹은 ‘진정한 쥬신의 왕’으로 설정해 민족 자존심을 고취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런 애국 마케팅은 ‘한류의 기대주’로서 배용준의 성격과는 정면으로 맞선다.

그러다 보니 ‘태왕사신기’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을 주요 시장으로 보는 이 드라마에 일본 또는 왜국이라는 나라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도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의외다. ‘동북공정에 맞서는 드라마’라고 널리 홍보된 것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 광개토대왕이 싸우는 상대는 중국이 아니라 ‘화천회’라는 범국가적 단체다. 중국을 자극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분명하지만 이미 중국 언론은 배용준과 이 드라마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민족의 자존심을 금과옥조로 삼는 재야 사학계에서도 “지나치게 고구려에 몰입해 그 못잖은 강역을 자랑하던 백제를 하잘것없이 묘사했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인다.

물론 배용준이 가는 길을 감히 막을 사람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온 아시아의 팬들에겐 이 모든 것이 완고한 아저씨들의 쓸데없는 ‘목에 힘주기’일 뿐이다. ‘태왕사신기’의 일본판 만화를 그리게 된 원로 만화가 이케다 료코의 소감을 들어 보자.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등을 그리고 최근 은퇴했던 이 거장은 “제의에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내가 거절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용준씨의 얼굴을 그릴 텐데 그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해 관계자들을 숙연(?)하게 했다는 후문이다. 일본인의 관심은 언제쯤 이 드라마를 자기네 안방에서 볼 수 있을까 하는 것뿐. ‘태왕사신기’는 12월 3일 NHK 위성방송을 통해 일본에 처음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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