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권위 투구’서 연예인 ‘양념 투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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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82년 3월 27일, 당시 서슬 퍼랬던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는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의 잊지 못할 이미지 중 하나다. 그 시절 시구는 빅 게임을 여는 장엄한 ‘의식’이었다. 25년이 흐른 2007년 시구는 경기에 감칠맛을 내는 ‘양념’으로 바뀌었다.

 기념일 중심의 시구 문화가 이벤트 중심의 상시 행사로 바뀐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다. 인기 여자가수의 시구를 보기 위해 중학생들이 아침부터 진을 치고, 선수 가족과 팬들이 마운드에 올라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는, 건빵 봉지 속의 별사탕처럼 항상 기대하면서 없으면 허전한 존재가 됐다.

 ◆누가 하나=시구는 한 시즌 동안(포스트시즌 제외) 서울 연고팀은 약 30회, 지방팀은 10~20차례 한다. 80년대 주요 경기 시구는 언제나 권력자의 몫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세 번이나 시구에 나섰고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 대전 올스타전에서 시구했다. 지역 자치단체장은 매년 홈 개막전 시구의 단골 손님이다.

 정·관계 인사가 아닌 시즌 개막전 시구자는 89년 영화배우 강수연(광주 해태-빙그레전)과 OB 베어스 성인회원 1호 이국신씨(잠실 OB-MBC전)가 처음이었다. 최근엔 경제권력의 부상과 함께 기업인들의 시구가 부쩍 늘어 횟수에서 정·관계 인사를 앞지르고 있다.

 연예인은 2000년대 시구자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서울 연고팀인 LG와 두산의 경우 올해 정·관계 인사 시구가 세 차례(LG 오세훈 서울시장, 두산 박재호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과 김정복 국가보훈처장) 있었던 반면 연예인은 LG가 12번, 두산이 17차례나 됐다. 지방 팀의 경우 거리가 먼 관계로 연예인의 시구가 적다. KIA는 올해 광주 홈에서 연예인 시구가 한 번도 없었다.

 선수 가족을 비롯해 특별한 사연을 담은 시구자도 많다. 2001년에는 투병 중인 롯데 임수혁의 아들 세현군이 사직구장 마운드에 서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같은 해 잠실에선 두 다리가 없는 한국인 미국 입양아 애덤 킹의 시구가 감동을 선사했다.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는 LG 포수 조인성과 짜고 공이 없어지는 ‘마술 시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방은 지역 대학 총장이나 총학생회장, 각종 단체장 등 지역 명사의 시구가 많다.

 ◆시구는 윈-윈 마케팅=구단 관계자들은 시구를 ‘윈-윈 마케팅’으로 본다. 시구자는 홍보 효과를, 구단은 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서로 이득을 보기 때문에 출연료도 거의 없다. 지방에 올 경우 교통비 정도만 지급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아쉬운 쪽과 배부른 쪽은 있게 마련이다. 개막전·어린이날·한국시리즈 등 큰 경기에서 시구는 대부분 자치단체장과 정치인의 몫이다. 선거 때가 아니면 1만 명이 넘는 유권자들과 한꺼번에 얼굴을 대할 수 있는 행사가 드물기 때문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시구를 하기 위해) 윗선에 압력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연예인의 경우 시기에 따라 차별화된다. 황우석 LG 마케팅팀장은 “개막전 시구자를 연예인으로 선정할 땐 당대 최고 인기 연예인에게 정중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전광렬(‘허준’), 최민식(‘올드보이’), 송강호(‘YMCA야구단’) 등이 LG의 역대 개막전 시구자였다. “시즌 중에는 야구에 관심이 있거나 홍보 효과를 노리는 재기·신인 연예인의 시구 제안이 많다”고 덧붙였다.

 시구가 마케팅 차원에서 이뤄지기는 하지만 “입장한 관중에게 눈요기를 제공하는 것을 넘는 관중 동원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지난 6월 잠실구장에는 돌아온 ‘불사조’ 박철순의 시구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팬들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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