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송충이와 갈잎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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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법 쑬쑬한 제의가 들어왔다.신문 광고에다 술과 관련된 수필을 써주면 원고료 암만을 주겠다는 것이었다.깜짝 놀랄만큼 큰 액수였다.때마침 궁하던 차에 귀가 솔깃했으나 광고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술 광고는 곤란하다 고 대답했다.그럼 커피 광고는 어떠냐는 새로운 제의가 들어왔다.그거라면 괜찮겠다고 대답했다.어떤 형태로든 아빠가 광고에 찬조출연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아이들이 반대했다.결국 그 아까운 원고료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같은 비인기인에게까지 그런 제의가 오는 걸로 미루어 광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실감한다.비전문 직업인들이 광고 모델로 등장하는 빈도가 갈수록 잦아짐을 본다.비전문인들을 보면서 새삼스레 광고의 위력과 함께 영상 매체의 위력을 느낀다.낯익은 문단 동료들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그들의 천연스런 모습에 절로 감탄하곤 한다.나한테는 왜 저런 재능이 없을까하고 한편으로 슬그머니 배가 아파지기도 한다.
나더러 두려움의 대상을 꼽으라면 우선 카메라부터 꼽겠다.카메라만큼 나를 기죽이는 대상은 없다.무시무시한 무비 카메라는 물론 심지어 보통 사진기 앞에서마저 나는 속절없이 등신이 되곤 한다.그처럼 못난 위인인지라 어쩌다 방속국으로부터 문학 관련 프로에 출연해달라는 제의라도 받을라치면 내가 왜 공연히 사서 병신이 되느냐 싶어 허둥지둥 도망치기에 바쁘다.
워낙 간덩이를 작게 타고난 탓인지 카메라 앞에 의젓이 서는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광고.영상 시대에 도무지 적응할 줄 모르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적마다 마치 신 포도를 두고 독백하는 우화 속의 여우처럼「그래,송충이는 그저 솔잎만 먹고 살아야지」하고 자위하곤 한다.애당초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도 뒷전에 숨어 내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바로 그 출중한 이점에 끌려 기쁘게 선택한 문학의 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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