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스탈린 電文 성공 보장되면 동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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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SBS-TV는 2일 오후11시 韓國戰의 북한 남침 사실을 처음 시인한 러시아 국영TV「오스탄키노」의 다큐멘터리『한국전 내막』1,2부를 90분간 방영했다.러시아는 이 프로를 방송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지금껏 주장과는 달리 자신들이 지원 한 북한의 남침전쟁임을 공식시인,국내외의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이 프로는옐친 러시아대통령의 前군사고문인 볼코고노프씨가 소장한 스탈린-金日成-毛澤東간의 대화록및 극비 전문과 한국전쟁에 소련 공군을이끌고 개입했던 크로마렌코 前소련공 군 중장의 증언을 토대로▲김일성-스탈린의 남침협의▲스탈린의 중공군 참전요구▲한국전에 개입한 소련공군의 활동등 한국전 내막을 상세히 전했다.이를 지면에 요약,소개한다.
[편집자註] 〈남침협의〉1949년1월 모스크바 근교 쿤체바 스탈린의 별장에 김일성의 서한이 날아든다.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희망은 같은해 3월5일 이뤄진다.별장에서 김일성을 만난 스탈린은『남쪽사람들도 북쪽군대에 간첩을 파견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북한에는 군사학교가 있느냐』고 물었다.김일성이『군사학교를 보유하고 있으며,(간첩에 대한)조치도 강구중 이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군대양성에 신중을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스탈린-김일성의 대화속기록).
1950년2월9일 스탈린은 스티코프 평양주재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결정적인 문서를 보낸다.『이것은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만약 성공이 보장된다면 우리는「동의한다」.』남침을 합의한 김일성과 스탈린은 수차례 비밀회동을 갖고 구체 적인 전쟁지원책을 논의한다.6월25일,북조선의 7개사단에 3개사단을 더 늘린 김일성은 단 한차례의 공격으로 남조선을 해방시킬 전쟁에 착수한다.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이즈음 스탈린에게『김일성이 탄약과 탱크.비행기등 군사장비를 7월까지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암호전문을 보낸다.전쟁초기 북조선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남해안까지 밀린 한국군과 미군은 그러나 미리 준비한 강력한 반격작전으로 전세를 뒤집는다.9월16일 미군은 인천에 대규모부대를상륙시켜 10일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내쳐 평양까지 진격한다.불과 10일전『외세침략군은 곧 궤멸할 것』이라는 승전보를 스탈린에게 띄웠던 김일성은『패배직전으로 자력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인민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로 구성된 의용군을 파견해달라』고소련에 긴급전문을 쳐야했다.
스탈린은 毛澤東에게 즉각 전문을 내보냈다.중국은 며칠동안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스탈린이 직접 참전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들은 당황한듯 했다.
10월14일에야 만족스러운 답변이 왔다.『필리포프 귀하.북경시각 10월6일 22시30분에 본인은 毛澤東을 방문해 귀하의 답장을 전달했습니다.본인의 말을 들은 毛는 현상황에 대한 귀하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미국인들에게 대항한 中蘇공동투쟁이언급된데 대해 매우 만족한다고 밝혔습니다.그는 만일 전쟁을 시작한다면 지금 당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또한 중국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도 이같은 견해를 피력했다고 했습니다.
중국군의 조선파병에 대해 毛는 5~6개 사단이 아니라 최소한9개사단을 파견하는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毛는 미군 1개 전열군단을 전멸시키려면 중국군 병력은 4배이상,그리고무장은 2배이상 필요하다고 했습니다.毛는 또 보병문제는 쉽사리해결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北京주재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비밀전문) 스탈린은『중국은 내가 요청한 5~6개 사단이 아니라 9개 사단을 파병할 준비가 돼 있다』고 즉시 김일성에게전했다.대규모 수송수단도 도로. 고속도로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은 전문을 받은 10일후인 10월하순에 중국군 사단을 실전에 투입한 것이다.
전선이 몇개의 방향으로 나뉘어 북으로 올라가기 시작할 무렵 스탈린은 중대한 결정을 했다.10월말까지 미국이 제공권을 장악하면 스탈린은 11월 특수전투비행단을 창설키로 한것이다.소련공군과 고사포부대가 직접 전투에 참가한 증거는 많다 .51년 영웅칭호를 받은 세르게이 크로마렌코 前소련공군중장은 참전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군복은 중국 해방군의 복장을 착용했다.상공에 조선말로 교신하기 위해서 조선어를 배웠지만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러시아로 교신했다.
스탈린이 특별창설한 4개사단,즉 64전투비행단과 2개 전투비행사단.2개 고사포사단및 또 하나의 지원사단은 초기엔 북조선의비행장에 배치됐다.이중 일부는 중국에 배치되기도 했으며 수시로교체됐다.5~6개월마다 연대별 또는 편대별로 교체돼 소련으로 돌아가고 다시 새로운 부대가 오곤 했다.
***美원자탄을 겁내 미군들은 대부분 바다로부터 공격했고,따라서 격추된 전투기는 바다로 떨어졌다.격추된 미군기는 1천9백9대에 달했다.소련군은 비행기 3백51대가 격추되고 조종사 3백11명이 전사했다.다른 견해도 있지만 5~7대가량 차이가 날뿐이다. 북한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 미국이 원자탄을 쓸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스탈린은 전쟁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경우 불리한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하게 됐던 것이다.당시 우리는 기껏 몇개의 핵무기만을 보유하고있는데 미국은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간 상태였다.그래서 스탈린은 언젠가 정치국원들과의 모임에서「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난것 같다」고 결론지었다.한국전은 20세기의 가장 치열한 국지전중 하나였지만 기록이 거의 없는 전쟁이기도 하다 .적잖은 소련군인들이한국전에 참여했다.64전투비행단의 페벨라예프 대령은 무려 19대의 미군기를 격추시켰다.또 미군기를 강제착륙시킨적도 여러번 있다.당시 최신예기였던 F86등 미전투기 몇대가 우리손에 들어왔다.그중 몇대는 소련으로 가져가 연구와 견학에 활용되기도 했다.항공연구소에는 지금도 이 비행기들의 비행자료.기술자료.엔진등이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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