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예산은 공무원 주머닛돈' 확인한 변양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동국대 재단이사장인 영배 스님이 창건한 흥덕사란 사찰에 10억원의 예산을 지원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변씨는 정책실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4월 대통령 사회정책비서관실의 한 행정관에게 이 사찰에 대한 예산 지원을 지시했고, 이 행정관은 지체 없이 행정자치부에 전화를 걸어 상관의 지원요청을 전달했다. 그러자 행자부는 이 사찰이 국고보조금을 신청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근처의 다리 공사 명목으로 10억원을 대줬다. 그러자 해당 지자체는 이 사찰 내 미술관 건립자금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나랏돈을 이리저리 빼돌려 기어코 이 사찰에 대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렇게 하기까지 꼭 열흘이 걸렸을 뿐이다.

참으로 일사불란한 지원체계가 아닐 수 없다. 특정 사찰에 나랏돈을 대주기 위해 청와대와 행자부, 지자체가 총동원됐고, 그 과정에서 불법과 편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됐다. 태풍 피해 주민에게도 이처럼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예산 지원이 이뤄졌을지 의문이다. 변씨가 영배 스님과 무슨 거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정책실장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의 턱 밑에서 사적인 목적으로 예산 지원을 지시하고, 정부 조직이 무리한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어이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는 게 문제다. 공무원이 나랏돈 10억원을 제 주머닛돈처럼 펑펑 쓸 수 있다는 발상이 놀랍고, 그런 불법 지시가 정부기구 내에서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통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청와대는 변씨의 부당한 지시 사실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확인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밝혀지기까지 청와대는 도대체 무얼 했는지 궁금하다. 더구나 이런 식의 예산 도용(盜用) 사례가 변씨 한 사람뿐이겠는가. 나랏돈이 대통령의 최측근 보좌진으로부터 술술 새는 마당에 드러나지 않은 예산 유출이 어디서 얼마나 자행됐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행정부를 운영하며 다른 사람들만 단죄하려는 이 정부 책임자들이 가증스럽다. 정부 조직을 믿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국민만 원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