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할 수 있다] 4. '철밥통' 선거구 획정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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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0년 1월 31일 오후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불상사가 발생했다. 김태랑 의원이 이상수 의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李의원은 선거구 획정위의 민주당 측 협상대표였다.

자신이 지구당 위원장으로 있는 창녕군을 밀양시와 통합키로 한 선거구 획정 결과에 대한 金의원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창녕 출신의 金의원으로서는 인구가 훨씬 많은 밀양과 통합할 경우 밀양을 기반으로 출마하는 후보에게 밀릴 것이 뻔했다. '밥그릇'이 날아갈 판이었던 것이다.

선거구 획정은 의원들에겐 정치적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문제다. 의원들은 물론 각 정당도 선거구를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정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 와중에서 유권자의 권리는 무시되고 정치권의 이해관계만 반영된 기형적이고 볼썽사나운 선거구가 만들어지곤 했다.

인천 선거구 중 강화-서구가 대표적이다. 이 선거구는 당초 1996년 강화와 계양구 일부 동이 합쳐져 강화-계양이 됐다. 당시 계양구에 비해 강화도에 더 가까운 인천 서구를 별 이유없이 건너뛴 탓에 '게리맨더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강화와 서구를 한데 묶었다. 그러나 강화와 서구는 직선거리로도 20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도 김포가 있어 인접 생활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15대 총선 때는 충북에서 가운데 끼여 있는 옥천은 별도로 놓아둔 채 멀리 떨어진 영동과 보은을 한 선거구로 묶은 일도 있었다. 결국 이 선거구는 헌법재판소에서 "명백한 게리맨더링"이라며 위헌판결을 받았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지금 정치권이 벌이고 있는 선거구 협상도 이런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지역구를 현행 2백27석에서 16석 늘어난 2백43석으로 늘리자는 한나라당과 이에 반대하는 다른 당 간의 협상이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인구증가와 선거구획정기준을 고려할 때 선거구수 증가는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어 문제는 더 복잡하다.

이미 협상과정에서 한 차례 인구산정 시점을 놓고 특정인을 거명한 게리맨더링 시비까지 겪었다. 국회정치개혁특위가 지난해 3월 말을 선거구 획정시의 인구산정 시점으로 합의하자 열린우리당 측이 "민주당 박상천 의원의 지역구(전남 고흥)를 살리려는 술책"이라고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고흥은 지난해 3월 말 기준으로 하면 인구 10만명이 넘어 독립선거구가 되나 지난해 10월 말로 할 경우에는 9만명으로 다른 선거구에 통합될 운명이었다. 의원들의 철밥통 기득권을 챙기는 식의 선거구 획정은 국민의 선택을 왜곡하는 것이다.

◆ 특별취재팀=김교준.이하경 논설위원, 강민석.강갑생 정치부 기자, 정선구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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