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멜로 몸은 액션 권상우… '천국의 계단"말죽거리 잔혹사' 돌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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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통유리로 양면이 훤히 뚫린 찻집에서 이 남자를 만났다. 좌우 유리벽에 숱한 소녀 팬들이 달라붙어 쉴 새 없이 휴대전화 카메라를 터뜨린다.

자리를 옮기려고 밖으로 나오자 소녀들이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를 구름떼처럼 둘러싸고 비명을 질러댄다. 이런 게 스타다. 요즘 세간에 첫손 꼽히는 스타 권상우(28)를 만나려면 이런 소란쯤은 감수해야 했다.

이 남자, 지금 쌍권총을 뿜어 대고 있다. 스크린에서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개봉 열흘만에 관객 수 2백만명을 넘어섰고, 브라운관에서는 '천국의 계단'이 40%가 넘는 시청률을 낸다. TV와 영화, 두 과녁을 명중시킨 화살도 이중 빛깔이다. 영화 후반부의 액션은 관객을 짜릿하게 만들고, 드라마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는 시청자를 찡하게 만든다. 이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비결은 무엇일까.

"처음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천부적으로 뛰어난 운동신경을 갖췄더라구요. 농구 시합때 덩크 슛하는 장면부터 옥상에서 몸을 날리며 발차기하는 드롭킥까지 모두 직접 해냈어요. 감히 말씀드리지만 한국에서 액션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에요."(영화'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

그는 속칭 '몸짱'이다. '말죽거리'의 소심한 전학생 '현수'가 마침내 웃통을 벗어제끼고 쌍절곤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남자라면 한번쯤 꿈꿔봤을 임금왕(王)자가 뚜렷이 드러난다. "웨이트 트레이닝만으로는 이런 몸이 안 돼죠. 원래 운동을 좋아해요. 어려서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했어요. '말죽거리'는 학교에서 싸우는 사실적인 액션이라 직접 해볼만 하다 싶었죠. 기회가 되면 1백% 액션영화도 꼭 하고 싶어요."

대전에서 보낸 고교시절, 길거리 농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는 그는 허우대만 좋은 게 아니었다. "액션 장면보다는 오히려 성격 연기를 해야하는 영화 초반부가 걱정됐죠. 처음 해보는 역할이니까요. 애드립도 해보고, 멋있게 보이고도 싶었는 데 그런 역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남들은 몇 십번도 반복해 찍는 데 저는 두세 번에 오케이가 나잖아요. 그게 오히려 불안하더라구요." 걱정과 달리'범생이'같은 현수의 수줍은 모습도 그는 썩 잘 소화해냈다. 유하 감독은 "대본을 보고 배역을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그게 내가 기대한 현수에 꼭 맞았다"고 돌이켰다.

그의 얼굴은 실은 '미남'보다는 '소년'에 가깝다. 교복 단추를 채워버리면 근육질 몸매가 줄 법한 위협감은 까맣게 잊혀지고, 애달픈 눈길을 실으면 짝사랑에 몸살 앓는 영화 속 10대의 표정이 살아난다. 교복을 고급 정장으로, 애절한 눈길을 도전적으로 바꾸면 사랑을 위해 재벌상속자의 지위까지도 버리려했던 드라마 속 '송주'로 돌아온다. "그 동안 망나니 역할을 많이 했는데, 사실은 진지한 연기가 가장 자신있어요. 저라고 왜 모르겠어요. 짝사랑도 알고, 여러가지 상실감을 알죠. 찍다보면 슬퍼져요. 이번 주 방송에 눈이 멀게 된 '정서'가 저를 '태화'인 줄 알고 대사를 하는 장면 찍을 때, 진짜 저도 슬펐어요." 그는 철이 들만큼 들 무렵에 연기를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군생활을 마치고, 패션모델로도 1년쯤 활동한 뒤였다.

"오디션에서 딱 봤을 때 깨끗한 게 여러가지가 나올 수 있는 얼굴이다 싶었죠. 착한 역은 물론 야비한 역도 잘 해낼 얼굴이에요. 성격이요?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숫기가 없는 타입이었죠." ( 영화'화산고' 김태균 감독) "신인이라 더 그랬겠지만 오기와 끈기가 보였어요. 남들보다 나이가 들어서 연기를 시작했잖아요. 오디션때요? 대담했어요. 보여줄 게 없냐니까 웃통을 확 벗더라구요."(드라마'맛있는 청혼' 박성수 PD)

출발은 영화였지만 촬영이 오래 걸려 중국집의 유쾌한 배달원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그의 데뷔작이 됐다. '숫기없음'과 '대범함'이 공존했던 이 묘한 신인의 오기는 결국 자신의 단점을 개성으로 만드는 데까지 이른다. "콤플렉스요? 발음 얘기는 다 아시잖아요. 저 몸 좋은 것도 반감 갖는 분이 많아요. 하지만 몸 안 좋은 배우보다는 몸 좋은 배우가 '현수'역에 낫죠. 발음이 안 좋으면 다른 걸로 더 좋은 거 보여드려야죠. 저 승부욕 진짜 강해요. 뭘하든 그걸로 채워갈 거에요."

이런 승부욕에 불을 지피는 대상은 누굴까. "남자는 남자만 보여요. 정우성씨, 송강호씨, 차승원씨 … 장점밖에 안 보여요. 동년배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싸움을 잘했는데, 4학년 때라고 4학년이랑은 안 싸워요. 6학년이랑 싸우지. 그런 기분 아세요? "

'말죽거리 잔혹사'는 배우로서 그의 무게감을 크게 키웠다. 그 자신도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는 기분으로 찍었다"며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냈다. 교복을 졸업하는 그는 다음에는 로만 칼라의 제복을 입을 참이다. 차기작인 영화 '신부 (神父) 수업'이다. "다들 신학생 역할이 저랑 하나도 안 어울린대요. 그러니 더 재미있잖아요. " 그에게서 '스타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고 싶다'거나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말 따위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장점이요? 너무 잘 안생긴 거죠.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잖아요." 이렇게 스스로를 잘 알고 있으니.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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