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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어느 여자 매니저의 에로 24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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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무슨 화장이에요."

지난 18일 오전 8시 경기도 일산의 한 휘트니스센터 모바일 성인 동영상 촬영 현장. 이민경(28.여.가명)실장은 투정부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 배우의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잔뜩 찍어 바른다.

"이것 봐. 뽀얘졌잖아."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이씨는 에로 배우 매니저이기도 하다. 에로물은 일반적으로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여자가 등장하는' B급 작품이다. 이 실장은 이 견고한 남성적 틀 속에서 일하는 유일한 여성 매니저다.

#1

이실장은 여배우 다섯명과 남자 배우 세 명을 데리고 있다. 남자 배우가 원래 네명이었는데 한 사람이 스키 강사라 겨울엔 촬영을 안 한다. 남자 배우들은 대개 부업삼아 이 일을 한다.

"남자 배우들은 바텐더.퀵서비스.휴학생, 여배우들은 IJ.내레이터 모델 등 다양해요."

남자 배우를 선발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지나치게 뚱뚱하거나 키가 너무 작거나 연기력이 전혀 없지만 않으면 된다. 여배우는 몸매.얼굴이 중요하다.

그녀가 특별히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여배우들에게 그녀는 든든한 언니 노릇을 한다.

"간혹 제작자가 지나친 체위 연기 등을 요구하면 제가 막아요. 아무래도 여자 입장에서 생각하니까요."

덕분에 모집 공고를 따로 하지 않아도 배우 지망생들은 제 발로 '여자 매니저'를 찾아온다.

#2

인터뷰 도중 누군가가 급히 그녀를 부른다. 알고 보니 휘트니스센터 직원 역할을 맡으라는 거다.

"배우 출연료가 비싸니까 단역은 스태프들이 맡아요. 이 일을 하면서 출연 안해 본 사람 없을 걸요. "

에로 영화에 나왔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까.

"에로 영화 주인공도 한 번 보고 잊혀지는 걸요. 모바일은 화면이 작아 더 못 알아봐요. 제가 데리고 있던 배우 중에 이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은 없어요."

요즘엔 모바일 동영상 촬영이 많다. 그 덕에 에로 비디오 시장이 침체됐어도 그녀는 여전히 바쁘다. SK텔레콤 멀티미디어 서비스인 준(June)의 지난해 12월 성인 동영상 정보 이용료 매출은 약 1억원. 지난해 1월 매출의 2배에 달한다.

무선 인터넷은 이용료가 비싸 길어야 3~5분 안에 끝나야 한다. 20시간가량 꼬박 촬영하면 동영상 25편가량을 찍을 수 있다. 빡빡한 촬영 시간 때문에 대본도 따로 없다. 줄거리만 대강 만든 뒤 감독.배우의 즉흥연기로 해결한다.

#3

이번엔 감독이 이실장을 찾는다. 이날 첫 촬영을 나온 신인 여배우의 연기 지도를 도와달라는 거다.

"처음 일 시작했을 때는 얼굴도 빨개지고 민망했죠. 하루 이틀만 지나면 적응돼요. 이제 하도 많이 봐서 웬만한 연기는 가르쳐요."

이번엔 백제동(31)감독이 베드신을 가르쳐 준다며 여자 역할을 한다. 남자 배우를 밀어 쓰러뜨린 뒤 얼굴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간다. 입술에 입을 대려 하자 남자 배우가 "으악!"하며 고개를 돌린다. 촬영장은 웃음바다가 된다.

"남자들도 많이 당해요."

남자들 사이에서 일하지만 특별히 기분 상한 적은 없다. "에로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음흉할 거라 오해하지만 오히려 신사적이고 깔끔해요. 예전에 방송.극영화쪽 에서 일할 때는 술자리에도 꼭 불려가는 등 맘고생이 훨씬 심했죠."

#4

두번째 촬영지는 부천의 한적한 논.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카섹스 촬영을 한다. 숨을 마음놓고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추운 날씨에 여배우들은 속치마 차림으로 차 밖에 기대 섰다. 반면 남자 배우는 옷을 벗지 않았다.

"여배우 출연료가 남자 배우보다 비싸요."

이실장의 부연 설명. 이실장은 촬영이 끝난 여배우에게 달려가 외투를 덮어준다.

"아유…안됐다. 안쓰러워요. 나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저런 건 못해."

그런 그녀가 이 일을 하는 까닭은.

"일이 재미있고 수입도 괜찮아요."

에로 업계에서 일하는 그녀지만 막상 야한 비디오 한번 빌려 보지 않았다.

"현장에서 다 보는데 그게 재미있겠어요? 현장이 더 재미있죠. 휴대전화도 구형이라 동영상을 못 봐요."

#5

대부분의 여성은 이실장처럼 현장을 볼 기회가 없다. 그러나 여성들이라고 야한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개인적이고 은밀한 수단인 인터넷으로 관심이 몰리는 추세. 여성포털 '여자와닷컴(yeozawa.com)'의 패션.뷰티 등 9개 서비스 채널 중 '사랑과 성'의 하루 방문객 수는 전체(5만명)의 20%(1만명)로 1위를 차지한다. 성인 동영상 콘텐츠 하루 방문자는 1천명. 단, 남성들과 취향은 확실히 다르다. 너무 적나라하지 않은 가벼운 에로물, 키스하는 방법.성교 테크닉 등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이 인기있다.

"여성들이 에로 업계에 많이 뛰어들어 여성 취향의 성인물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여성이 원하는 건 부드럽고 배려해 주는 관계랍니다. 솔직히 돈만 있으면 제가 만들고 싶어요. 에로물은 남성만 본다는 편견 때문에 제 생각에 동의하는 제작자를 찾기는 어렵더군요."

여성을 위한 성인 사이트 '팍시러브'(www.foxylove.net)의 주인장이자 최근 '즐거운 딸들-여자, 섹스를 말하다'란 책을 지은 이연희(28.여)씨의 말이다.

글=이경희.구희령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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