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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성인 비디오 변천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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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비디오대여점 진열장의 한 귀퉁이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에로 비디오. 이른바'성인 비디오'로 통해온 이땅의 에로 비디오(Erotic video)영화사(史)는 길게 잡아야 20년 안팎이다.

에로 비디오는 엄밀히 말해 극장 개봉작인 애마부인이나 산딸기.변강쇠 같은 에로티시즘 영화(35㎜필름)들과는 장르가 틀리다. 에로 비디오의 효시로 불리는 작품은 1988년 출시된 '산머루'다. 성불구자인 남편을 고치기 위해 아내가 간호사를 내세워 이런 저런 '성적(性的) 물리치료'를 받게 한다는 얘기를 줄기로 삼고 있다.

이렇듯 초창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만 해도 에로 비디오물들은 극장에서 개봉하는 에로영화들과 엇비슷했다. 주로 대사와 스토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다. 남녀간 사랑이나 성적 팬터지.갈등 문제를 큰 줄기로 삼으면서 적당히 정사(情事)신을 끼워넣는 식이었다.

유.무형의 각종 장벽에 부닥쳐 감질만 나게 하던 에로 비디오는 90년대 중반 여배우 진도희 주연의 '젖소부인 바람났네'가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실제로 '젖소부인…'시리즈는 1만5천여장 판매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국내 에로 비디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문제작'이 됐다.

특히 진도희는 그간 음지에서 활동하던 '에로 스타'라는 타이틀을 양지로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유리.하소연.은빛 등 최근 활동하는 에로 전문배우들이 당당히 대중스타로 대접받게 된 것도 사실 그의 공이다.

90년대 중반 들어선 에로 비디오의 '황금기'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해외로까지 그 무대를 넓히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유호 프로덕션이 만든 '성애의 여행'이다. 시리즈물인 '성애의…'은 러시아.프랑스.네덜란드 등 해외 로케를 시도한 첫 작품. 여기에 다양한 국적의 외국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등 이른바 '국제화'를 시도해 큰 화제를 모았다. 삐삐러브.샤넬 No5 등 기존 에로 비디오 제작비의 서너배인 1억원 이상 투입한 '고품격 작품'이 나온 시기도 바로 90년대 중반이다.

90년대 후반 에로 비디오는 극장 개봉을 겨냥한 에로 영화와는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사회인식이 성문제에 개방적이 된 데다 극장 영화와의 차별화를 위해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를 늘리거나 극장 영화를 패러디하는 쪽이 늘었다.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가 부각될 수 있었던 데는 촬영도 간편하고 동시녹음이 가능한 6㎜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이 큰 몫을 했다." '한국 에로 비디오의 변천과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명지대에서 석사 논문을 받은 유병호 유호프로덕션 대표의 해석이다.

특히 극장 개봉작이나 인기 TV프로그램의 제목 또는 내용을 코믹하게 베끼는 패러디는 에로 비디오가 살아남기 위한 대표적인 몸부림이 됐다. 예컨대 반칙왕이라는 영화가 나오자마자 변칙왕.반칙여왕.정력왕 같은 에로물들이 비디오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이 밖에 공동섹스구역(공동경비구역 JSA).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인정사정볼 것 없다).털밑 썸씽(텔미썸딩).여간첩 리철순(간첩 리철진).떡갈나무 침대(은행나무 침대).쥬라기 여관(주라기 공원).번지점프 중에 하다(번지점프하다).벗기전인 그녀(엽기적인 그녀)등의 식이다.

인기 TV프로그램도 패러디의 단골 소재다. 용의 국물(용의 눈물).헉!준(허준).체험! 성의 현장(체험! 삶의 현장) 등이 대표적인 TV패러디 작품들이다. 또 침대는 움직이는 거야(사랑은 움직이는 거야).20살 찌찌엘(20살의 티티엘)같은 CF패러디도 적지않게 선보였다.

패러디는 심지어 같은 에로 영화를 벤치마킹하는 식으로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젖소부인 바람났네'시리즈다. 이 작품이 나온 이후 '××부인'의 식으로 다른 에로 영화의 제목 베끼기 붐이 폭발했다. 자라부인 뒤집어졌네.밧데리 부인 충전됐네.만두 부인 속터졌네 등이 대표적인 '××부인'의 아류작들이다.

2000년 들어 에로 비디오는 또다시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된다. 에로 비디오업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봉만대 감독이 물꼬를 텄다. 그가 2000년 내놓은 '이천년'이란 작품은 '젖소부인…'이후 노출 수위나 내용에 있어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한 화제작이다. 무엇보다 30대 여배우나 중년남자들이 판치던 에로 영화스타들을, 이른바 꽃미남 스타일의 남자 배우와 미소녀들로 교체하는 등 배우의 연령대를 확 끌어내렸다(봉감독은 이후 2003년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으로 극장 개봉 영화 감독으로 정식 데뷔했다).

하지만 영세업체 간의 과당 경쟁에다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라는 '강적'을 만난 탓에 에로 비디오 업계는 최근 그야말로 '애로'를 겪고 있다.

유병호 사장은 "사실 에로 비디오만을 만들어 돈을 버는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에로물을) 찾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산업은 죽지 않는다. 다만 비디오만이 아닌 케이블TV, 해외 위성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 공급할 만한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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